거짓말

2010.02.22 13:39

DJUNA 조회 수:6677

영화는 거짓말쟁이 장르입니다. 편집이란 것이 개입된 순간부터 영화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죠. 사실 영화라는 예술의 진짜 장점은 편집과 촬영으로 관객들을 기만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시간 반짜리 거짓말을 구경하러 영화관에 갑니다.

기초적인 것들을 보죠. 여자 주인공이 키스하기 위해 입술을 반쯤 벌리고 카메라한테 다가갑니다. 시작부터 거짓말입니다. 여자 주인공이 가까이 다가가는 대상은 상대 배우가 아니라 카메라니까요. 여자 주인공의 반짝이는 눈도 가짜입니다. 그건 로맨틱한 효과를 내기 위해 스탭이 카메라 뒤에서 아이 라이트를 쏘아준 결과입니다. 여자 주인공의 시선도 가짜입니다. 키스하면서 키스하는 사람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사팔눈이 될 수밖에 없거든요. 여자 주인공은 상대방을 보고 있지도 않는 거예요.

왜 그들은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일단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배우들은 자기가 실제보다 아름답게 나오기를 바랄 겁니다. 아직까지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들보다 키가 커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비싼 배우에게 직접 액션 연기를 시킬 수 없으니 스턴트 더블이 요구되고요. 누드 장면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작고 투명한 속옷도 있고 화성인 침공을 묘사하기 위한 특수 효과도 있습니다. 어떤 스타들은 엉뚱한 것들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레타 가르보는 발이 나오지 않는 장면을 찍을 때는 늘 슬리퍼를 신고 연기했어요.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이유보다 더 심오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감독들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폭력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폭력 자체를 찍는 대신 폭력적인 인상을 주는 것을 찍어야 한다." 화면 속의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로맨틱한 사랑을 눈으로 직접 봐야합니다. 어쩔 수 없이 잔재주가 끼어드는 것이죠.

하여간 그 때문에 영화 촬영장은 진지한 결과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감동적인 서부극 [셰인]의 촬영 현장은 코미디였을 것입니다. 셰인을 연기한 앨런 래드는 키가 아주 작아서 진 아서와 함께 연기할 때는 통 위에 올라서야 했으니까요(덜 노골적이지만 비슷한 테크닉이 [델마와 루이즈]의 지나 데이비스와 수잔 서랜든의 키를 맞추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나중에 두 사람이 시상식장에 같이 나왔을 때 그들의 키 차이가 엄청나다는 걸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죠.) 히치콕의 [오명]에서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리 그랜트는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키스신을 나누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상대방 배우에 가까이 딱 붙어서 동시에 방을 가로지르는 곡예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스타 워즈: 에피소드 1]의 자자 빙크스나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와 같이 가상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영화에서는 배우들이 현실감있게 연기할 수 있게, 그런 캐릭터로 분장시킨 성우들을 내보내기도 하죠.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살짝 더 나갑니다. 우리는 여자 주인공의 눈이 존재하지도 않는 광원에 반짝이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신나는 우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방에서 삼차원 서라운드 시스템이 요란한 폭발음을 내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공기가 없는 우주 공간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리는 절대로 없을텐데 말이죠. 우주에서 벌어지는 실제 모험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처럼 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성 영화가 아닌 이상 소리 없이 우주전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소리가 나건 나지 않건,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극장들도 바랄 겁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음향 시설을 달았는데, 무성 영화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면 어쩌라는 거죠?

그 결과 조작된 초현실적인 사건들이 습관처럼 쌓여서 영화 속의 물리학을 만들어냅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박스 바니나 로드 러너가 주인공인 워너 단편 만화들입니다. 코요테가 로드 러너를 쫓아 마구 달려갑니다. 그러다 그는 자기가 절벽에서 벗어나 허공 중에 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의 우주에서 중력의 법칙은 떨어지는 자의 인식 여부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코요테와 로드 러너의 우주에선 인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코요테가 떨어지기 위해서는 코요테 자신이 자기가 허공 중에 떠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인식이 중력과 결합하는 순간 코요테는 추락합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꽈광!)

그러나 실사 영화의 거짓말은 대부분 그런 것보다는 은밀합니다. 무엇을 예로 들면 좋을까요? 이런 건 어때요? 기관총을 맞아 죽는 남자들을 보면 대부분 요란하게 유리창을 뚫고 뒤로 나자빠집니다. 실제로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관총의 총격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지만 시체를 뒤로 던져서 쇼윈도우의 유리를 깰 정도로 엄청나지는 않아요. 그건 순전히 관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쇼일 뿐이죠.

조금 과격한 것도 있습니다. [파리의 늑대인간]에서 주인공은 에펠탑에서 번지 점프를 합니다. 과연 뿔모양의 건축물에서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바람이 좋아도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같은 가속도로 먼저 떨어지는 것이 분명한 여자 주인공한테 수퍼맨처럼 날아들어 구출하는 것은? 스카이다이빙이 아닌 이상 역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린 이 가짜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관객들도 감독도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고 서로가 그게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하긴 보름달만 뜨면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에펠탑에서 번지 점프하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 있죠?

그러나 이보다 더 지나쳐서 도대체 주체할 수 없는 가짜도 있습니다. 자칭 SF인 [아마게돈]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에선 텍사스만한 소행성이 지구로 날아드는데, 사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행성은 영화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구형일 수밖에 없으며, 존재 여부도 훨씬 이전에 알 수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이런 소행성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영화 제작자들은 왜 이런 소행성을 만들었을까요? 타협한 겁니다. 모험을 위해서 주인공들은 소행성 위를 걸어다녀야 합니다. 당연히 중력을 위해 어느 정도 커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영화에 박진감을 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데드라인이 필요하니까 너무 일찍 발견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늦게 발견된 괴물 같이 큰 소행성이었죠. 유감스럽게도 이 소행성의 존재는 에펠탑 번지 점프보다도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관객들을 두고두고 괴롭혔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괜찮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마게돈]의 소행성도 꼭 무지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자들이 '모르고' 실수를 했다면? [제국의 역습]을 보죠. 그 영화에는 소행성에 숨어사는 거대한 괴물이 나옵니다. 이 괴물이 존재 자체가 말도 안되긴 하지만 보기에 근사하니 넘어가기로 하죠. 하지만 공기도 없는 외계에 나가면서 우주복도 안 입은 채 산소 마스크만 달랑 쓰고 나가는 레이아 공주 일행은 도대체 무슨 똥배짱이냐 말이에요. 이들에게 우주복 입히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작 당시, 사람들에겐 우주 공간의 0 기압과 극과 극을 달리는 외부 온도 따위는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더 바보 같은 예는 [수퍼맨]에 나옵니다. 영화 후반에 수퍼맨은 로이스 레인이 죽자 기괴한 짓을 합니다. 미친 것처럼 지구 주변을 빙빙 도는 거예요. 그러자 모든 것이 거꾸로 흘러가더니 로이스 레인이 살아있는 당시까지 역진합니다. 수퍼맨은 로이스 레인을 구하고 영화는 해피 엔딩입니다.

하지만 수퍼맨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요? 전 처음 보았을 때 수퍼맨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 과거까지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수퍼맨이라고 해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 수 없고 혹 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 식으로 과거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이런 건 싸구려 SF에서는 일종의 관례였죠. 그런데 모 영화 퀴즈 프로그램에 따르면 진상은 이 보다 더 심각했군요. 수퍼맨은 지구를 뒤로 돌렸다는 거예요! 이 이상한 논리에 따르면 지구를 자전 방향의 반대로 돌리면 시간도 거꾸로 흘러갑니다!

우린 이런 논리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글쎄요. 어딘가에 선을 긋기는 그어야 합니다.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세상을 이처럼 멋대로 바꿀 권리는 없을테니까요. 아마 선은 요란한 우주전과 [아마게돈]의 괴물 소행성 사이에 있을 겁니다. 우린 그 어중간한 선을 가끔 감시하며 영화 속에서 비틀려지는 진실들을 즐기면 그만이죠. (00/02/2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2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3] DJUNA 2010.03.08 3786
81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5] DJUNA 2010.03.06 2818
80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7] DJUNA 2010.03.06 2779
79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42] DJUNA 2010.03.06 3829
78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2] DJUNA 2010.03.06 2333
77 Q님의 1번 주제에 의한 듀나의 변주 [6] DJUNA 2010.03.06 8287
76 달콤쌉싸름한 로맨스 [1] DJUNA 2010.03.06 7701
75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7] DJUNA 2010.03.06 3907
74 [분신사바] 각색하기 [1] DJUNA 2010.03.06 7930
73 [령] 리메이크 하기 [1] DJUNA 2010.03.06 6485
72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34] DJUNA 2010.03.06 3860
71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7. 하교) [1] DJUNA 2010.03.06 3136
70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6. 야간자율학습) [37] DJUNA 2010.03.06 5426
69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5. 오후자습) [1] DJUNA 2010.03.06 2710
68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4. 점심시간 - 신체검사) [1] DJUNA 2010.03.06 3023
67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3. 오전수업) [1] DJUNA 2010.03.06 2962
66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2. 등교) [7] DJUNA 2010.03.06 326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