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팬들

2010.03.05 09:44

DJUNA 조회 수:7861

얼마 전에 [피아노]에 나오는 안나 파퀸 장면들을 몽땅 캡쳐해서 제 안나 파퀸 사이트에 올렸답니다. 다 합쳐서 333장이에요. 올리는 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답니다. 26메가가 넘으니까요.

이게 얼마나 귀찮은 작업인지 아세요? 보통 DVD 캡쳐 화면은 480 x 720입니다. 실제로 풀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3:4 화면 비율보다 약간 옆으로 더 길죠. 540 x 720 또는 480 x 640으로 맞추어주지 않으면 약간 눌린 화면이 됩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피아노] DVD는 레터박스이기 때문에 위 아래 검은 리본을 잘라내야 합니다. 양쪽에도 검은 부분이 약간 있으니까 716 x 388로 캔버스를 잘라줄 수밖에 없죠. 사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양 옆의 파란 색 때문에 좀 더 잘라주어야 했었는데 중간에 바꾸기가 뭣해서 포기했답니다.

여기서 끝나느냐. 천만에요. 333개의 섬닐을 만드는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아나모픽이라면 위의 두 작업은 없어도 되었을텐데 말이에요. 아나모픽 화면 캡쳐 파일은 화면비율이 제대로 맞고 잘라낼 검은 부위도 아주 적어서 무시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죠.

자, 그런데 과연 제 페이지에 들르는 안나 파퀸 팬들이 이 엄청난 수고를 해서 올린 333장의 파일에 고마워하기는 할까요? 2년 전까지만 해도 전 골수팬들로부터 열정적인 반응을 얻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것 같지가 않아요.

왜? 그 동안 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요샌 확실히 알겠어요. [엑스 맨] 미국 개봉 직후 제 안나 파퀸 페이지에 게스트북을 달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올라가는 글을 보면 거의 소외감이 느껴집니다. 모두 혈기 왕성한 틴에이저 남자 아이들의 글로 전형적인 십대 언어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얘 사이트를 처음 열었을 당시 팬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국내에서 [제인 에어]가 개봉된 직후였고 미국에선 [아름다운 비행]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던 당시였지요. 소수의 팬들은 성비가 비교적 고른 편이었고 연령층도 다양했습니다. 가정 주부에서 대학교수까지 직업폭도 넓었고요. 하지만 다들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영문학(카슨 맥컬러즈, 브론테 자매... 기타 등등 기타 등등...)에 대한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고 많은 수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영화들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전 그 때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정은 그 뒤로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얘도 이제 틴에이저 배우가 된 것이지요. 아마 요새 제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아이들은 대부분 [엑스 맨] 이외의 안나 영화는 본 적도 없을 겁니다. 봤다면 [쉬즈 올 댓] 정도겠지요. [피아노]나 [제인 에어], [결혼식의 멤버]는 분명 그 사람들 취향이 아닐 거예요. [아름다운 비행]같은 가족 영화는 또 무시할 거고요. [헐리벌리]는 지루해서 못봤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 이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겠군요. 끝도 없이 [엑스 맨] 이야기만 할 수는 없어요. "2편에서 로그의 파워가 얼마나 높아질까" 따위의 논쟁에 끼어드는 방법은 아직도 모르니까요. 안나의 '섹스 어필'에 대해 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는 더욱 난처해요. 저한테는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각오했어야 할 일이기는 했어요. 아역 배우들은 급격히 모습을 바꾸기 마련이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팬들도 바뀌기 마련이죠. 그 중간 과정에 틴에이저 팬들이 부글거리는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도 당연했고요. 하지만 그 많던 성인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아마 게스트북에 뭔가 남기는 것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쑥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안나가 그렇게 바뀌기는 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틴에이저 취향에 맞는 안나의 영화는 [엑스맨]과 [쉬즈 올 댓] 두 편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숀 코너리와 출연하고 있는 거스 반 산트의 영화도 그렇게 틴에이저들에게 어필하는 영화는 아닐 거예요. 요새 역할 폭이 넓어지기는 했어도 배우로서의 성격 자체가 얇아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틴에이저 팬들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안나의 역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말이지요. 슬프군요.

안나 파퀸 페이지에 비하면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 사이트를 돌리기가 훨씬 쉽습니다. 운영하는 것도 즐겁고요.

물론 그 동안 KST 팬들도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성비가 (역시) 비슷했고 주로 소수의 영국 영화나 마스터피스 시어터 물들의 팬들이었습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과학자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요새 팬들은 KST가 [잉글리쉬 페이션트]와 [호스 위스퍼러]에 출연하는 동안 이 배우에게 끌린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여자들이고 다국적이며 연령은 꽤 높습니다.

이들과는 대화가 됩니다. 수가 많지 않지만 열성적이고 틴에이저의 호르몬이 넘치는 표현들이 없어서 대화에 낄 수도 있습니다. KST팬들 사이에서는 저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요. 새로 생긴 팬들도 예전 영화들을 보는 것에 적극적이므로 처음 보고 반한 영화에만 매달리는 경우도 없으니까요.

안나 팬들에게도 지금의 KST팬들에게 느낄 수 있는 소속감을 느낄 날이 올까요? 모르겠습니다. 전 예전의 아늑한 느낌이 좋지만, 또 안나가 큰 배우로 성장해서 더 많은 팬들을 얻기를 바라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 '틴에이저 배우' 시대는 빨리 지났으면 좋겠군요. 전 팬들과 진지한 대화를 원하지만 요새 팬들과는 그게 거의 불가능해요. 안나의 이메일 주소를 모른다고 답장 쓰는 것도 지쳤답니다. (0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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