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자 (1977)

2010.01.30 21:10

DJUNA 조회 수:4423


(스포일러가 있지만 신경쓰실 필요없답니다.)


[겨울여자]의 원작은 조해일이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동명의 신문소설이죠. 당시엔 정말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뒤에는 10만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답니다. 하지만 지금 과연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군요. 20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다들 제목만 기억하고 잊어버린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이 된 듯 해요. 절판되었는지 서점에서도 찾기 힘들고요.


영화도 개봉당시 원작만큼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장군의 아들]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만 해도 단성사 단관 개봉 56만이라는 건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었어요. 이 영화로 장미희는 10여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 배우로 영화계를 군림하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영화는 그 동안 어떻게 나이를 먹었을까요? 얼마 전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봤는데, 결코 나이를 잘 먹었다고 할 수는 없겠더군요. 일부는 어쩔 수 없는 영화 수준의 한계 때문이고 일부는 그 동안 관객들도 많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화라는 여자의 삶을 따라갑니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제1부에서 고등학생인 이화는 스토커처럼 뒤를 따라다니며 연애편지를 보내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데, 그 사람은 근처에 사는 부잣집 아들 요섭이었죠. 둘은 사귀지만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견뎌내지 못한 요섭은 이화가 자신을 뿌리치자 그만 자살해버립니다. 제2부에서 대학생이 된 이화는 운동권 학생인 석기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석기를 통해 이화는 자신의 삶의 영역을 조금 넓혀가지만 석기 역시 군대에 간 뒤 교통사고(!)로 죽고 말아요. 제3부에서 이화는 옛날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지금은 대학에 있는 허민을 만나 덜컹거리며 사귀게 됩니다. 둘의 관계가 깊어지자 허민은 결혼을 바라지만 청혼을 거절한 이화는 허민에게 전처와 재회하는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의 곁을 떠납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줄거리인데, 김승옥의 각색은 원작의 마지막 단계를 빼먹은 모양입니다. 영화화되지 않은 4부에서 이화는 괜찮은 성격의 자활원 소장을 하나 만나는 모양인데 끝에 가선 이 남자의 곁도 떠난다는군요.


영화는 성장물처럼 보입니다. 주인공이 각기 다른 성격의 남자들을 한 명씩 거쳐가며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의도겠지요. 적어도 이야기의 논리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명목상 주인공은 장미희가 연기하는 이화지만 우린 이 캐릭터에 대해 어떤 친밀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내면 묘사가 거의 되어있지 않고 그것도 헐겁기 짝이 없으니 말이에요. 정상적인 영화에서는 이화가 세 남자들과 상호 작용을 거쳐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는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화는 정말 텅 빈 캐릭터거든요. 이 한심한 친구는 자기 생각도 없고, 자기 취향도 없고, 그 흔해빠진 여자 친구 하나 없으며, 각 스테이지마다 사귀는 남자 이외에 자기 생활도 없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로 건너 뛸 때마다 뭔가 얻은 것 같긴 한데, 그 역시 내면화되어 있지 않아 설득력이 없고요. 특히 3부에서 허선생에게 프리섹스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을 때는 그 어설픔 때문에 짜증이 팍팍 날 지경이랍니다. 괜찮은 남자를 만났는데도 떠난다는 4부가 있었다면 자기 논리라도 설텐데, 영화에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영화가 신경쓰는 것은 각 단계에서 이화를 만나는 세 남자의 고민과 심리묘사입니다. 이들은 모두 70년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들이고 아주 고약스러운 방식으로 자기합리화가 되어 있지만 관객들은 비교적 쉽게 그들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주인공이 이화가 아니라 이화를 만나 어리벙벙해진 세 남자들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제목을 [겨울여자]라고 달아놓은 이 영화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시점에 맞추어져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생각해보면 이화는 젖살붙은 20살 여자 모습을 한 편리한 장난감입니다. 가짜 엄마에서부터 섹스 토이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원하는 것들만 뽑아 조립한 인조인간이에요. 이화는 당시 그 시대의 성처녀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뭐 팔딱팔딱 뛰어야 할 캐릭터가 '성처녀'란 말을 들었다면 그 한계는 명명백백하죠. 이 간도 쓸개도 없는 캐릭터는 만나는 남자마다 그냥 '줍니다'. 프리섹스의 개념을 어디서 주워들은 뒤로 주는 건 섹스고요. 그렇다고 자기가 섹스 자체를 즐기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아낌없이 주는 거죠, 젠장.


영화는 그냥 낡아보입니다. 김호선의 스타일은 70년대 당시 관객들에게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신선해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샌 그냥 서툴러 보이기만 하는군요. 그렇다고 그 낡음을 보완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할 바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장미희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모두 그냥 둥둥 떠다닙니다. 이들은 모두 전문 성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대신하고 있는데, 극단적인 성우 스타일과 이런 영화들의 가식적인 대사들이 결합되면 어떤 코미디가 연출되는지는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네, 이번 상영 때에도 "선생님은 바보!"라는 대사가 나오자마자 제 주변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자지러지더군요! :-)


전 읽지도 않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조해일이 원작에서 이 성처녀적 캐릭터에 어떤 깊이를 담아냈는데 영화에선 그걸 살리지 못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5년전의 인기가 지금까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세상엔 나이가 들면서 고전이 되는 영화가 있고 고물로 끝나는 영화가 있는데, [겨울여자]는 어쩔 수 없는 후자입니다. 현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70년대 한국 영화 여자 주인공들이 얼마나 흉악스럽게 내숭을 떨었는지 보여주는 자료 이상은 아닌 듯 합니다. (04/01/05)


★★


기타등등

1. 김호선은 82년에 이 영화의 속편인 [겨울여자 2]를 냈습니다.


2. 이 영화에서 장미희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는 장유진입니다. 데뷔작이었다나요. 텔레비전에서는 그렇게 분명히 인식되는 목소리가 한국 영화 더빙 연기 특유의 무개성적인 간사함 속에 쉽게 묻혀버리는 걸 보면 좀 무섭답니다. 


감독: 김호선 출연: 장미희, 신성일, 김추련, 신광일, 선우용녀 다른 제목: Winter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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