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항해자여 Now, Voyager (1942)

2010.02.01 00:14

DJUNA 조회 수:9354

 

The untold want by life and land ne'er granted,
Now voyager sail thou forth to seek and find. 
 
                                             --Walt Whitman


"Don't ask for the moon--we have the stars." 저 같은 사람은 맨 정신으로 읊을 수 없는 이 노골적으로 통속적이고 로맨틱한 마지막 대사는 [가라, 항해자여]의 영화사적 위치를 슬쩍 드러내줍니다. [스텔라 달라스]의 원작자 올리버 히긴즈 프루티가 쓴 동명의 통속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클래식 할리우드가 한동안 생산해왔던 뻔뻔스러운 신파 통속 멜로드라마 장르의 정점에 선 작품입니다. 취향에 따라 다른 영화들을 앞에 끌어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이 장르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이 영화를 늘 가져오게 됩니다.

 

네, 정말 [주말의 명화]식 영화입니다. 정작 이 영화를 [주말의 명화] 시간에 본 적은 없지만 그건 상관 없죠. [가자, 항해자여]는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말의 명화] 시간에 당연하다는 듯 방영했던 고물 영화들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 요새 영화 담당 기자들은 '영화사 불후의 걸작'에서 분리된 '추억의 명화' 섹션에 이 영화를 밀어넣겠지요.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어떻게 그 사람들은 그 둘을 그렇게 쉽게 분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글러스 서크나 [카사블랑카]는 어느 쪽에 들어갈까요?)

 

[가라, 항해자여]의 주인공은 보스턴 상류 집안의 노처녀인 샬롯 베일입니다. 폭군 엄마 밑에서 30여년 간 시달리던 그녀는 영화가 시작될 무렵엔 맘고생이 선을 넘어 심각한 신경 쇠약을 일으키고 말죠. 이 때 백마 탄 기사처럼 짠 하고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명망높은 정신과 의사인 재퀴드 박사였던 것입니다. 샬롯의 문제를 잽싸게 간파한 그는 그녀를 자기 요양원으로 탈출시킵니다.

 

재퀴드 박사는 정신분석이 대유행이던 40년대 미국 영화에 당연하다는 듯 등장했던 수많은 수퍼 정신과 의사들 중 한 명입니다. 아마 이 영화로 당시 정신의학계가 입었던 홍보 효과도 상당했을 거예요. 재퀴드 박사의 요양원에서 몇 달 지내는 동안 샬롯이 보여준 대변화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자막도, 더빙도 없이 옆에 있는 변사들의 도움으로 내용을 간신히 이해해가며 이 영화를 보았던 어린 시절의 저는 정신의학이란 너무나도 위대한 학문이어서 석 달만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영화 속의 샬롯같은 뚱보 노처녀도 살이 빠지고 시력이 좋아지며 베티 데이비스 풍의 강렬한 미모와 패션 센스, 사교술 등등이 생길 뿐만 아니라, 담배불을 대신 붙여주는 잘생긴 남자 친구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가라, 항해자여]가 제공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재미는 샬롯의 이런 변화에 있습니다. 속이 숮처럼 바싹 타버린 못생기고 수줍은 노처녀가 반 년만에 화려한 할리우드 여자 주인공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통쾌한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어요? 특히 자존심을 되찾은 샬롯이 이전처럼 딸을 조종하려는 어머니와 정면 대결을 하는 장면을 보면 속이 다 후련해집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로맨스 영화입니다. 자신이 막 얻은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할지 몰라 바짝 굳어있던 샬롯은 유람선에서 유부남 건축가 제리 더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아뇨, 둘은 불륜까지 가지 않습니다. 둘 다 엄청나게 양심적인 사람들이라 제리의 결혼을 박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요. 샬롯의 엄마를 꼭 닮은 제리의 아내가 살아서 버티고 서 있는 한 샬롯과 제리의 사랑이 웨딩마치로 이어질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이 영화가 눈물짜는 신파극의 대표적인 예로 남는 이유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이런 설정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가라, 항해자여]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과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어느 누구도 슬퍼하는 것 같지 않거든요. 제리를 포기한 대신 재퀴드 박사의 새 환자가 된 제리의 딸 티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샬롯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보입니다. 위에 언급한 "Don't ask for the moon--we have the stars."라는 샬롯의 마지막 대사는 일종의 행복한 한탄입니다. 결혼으로 끝나는 연애담보다 더 해피 엔딩인지도 모르죠. 대부분의 결혼은 로맨스의 종말이지만 샬롯과 제리의 결백한 로맨스는 아마도 평생을 끌테니까요.

 

로맨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담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죠. [가자, 항해자여]만큼 담배가 다양한 역할을 하는 영화도 많지 않을 거예요. 재퀴드 박사의 파이프 담배가 그의 가부장적 권위와 독특한 성격을 묘사하고, 신경 쇠약에 걸린 샬롯이 방 안에서 몰래 피워대는 담배가 그녀의 필사적인 느낌과 반항심을 전달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담배 장면은 역시 두 주인공의 로맨스와 연결되어 있죠. 담배를 두 개 물어 같이 불을 붙인 뒤 하나를 샬롯에게 건내는 제리의 독특한 버릇 말입니다. 말로 하면 별 게 아닌데, 영화 속에서 이 간접 키스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로맨틱합니다. 육체적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전달하는 감정을 농축시키는 과정에 비밀이 있는 게 아닌가 싶군요. 전체적인 영화 성격과 관련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의 사랑은 할리우드 전문가의 조명에 빛나는 담배 연기처럼 아름답지만 정작 물리적 실체는 없는 순수한 로맨스인 것입니다.

 

[가라, 항해자여]는 여러 모로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베티 데이비스의 불꽃 튀는 연기, 아카데미상을 받은 막스 스타이너의 호사스러운 음악, 솔 폴리토의 흑백 촬영, 올리 켈리의 의상과 같은 것들이 적절히 결합되자 뻔하고 통속적이지만 고도로 세련된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고물 영화가 선사하는 염치없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은 요즘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이 영화를 다시 보았던 2시간은 여러 모로 행복했답니다. (01/11/19)

 

★★★☆

 

기타등등

중간중간에 익숙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따라하는 동안 DVD 영어 자막이 노래방 자막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영어 자막은 그렇게까지 원래 대사에 충실한 것이 아니더군요.

 

감독: Irving Rapper 출연: Bette Davis, Paul Henreid, Claude Rains, Gladys Cooper, Bonita Granville, John Loder, Janis Wilson, Ilka Chase

 

IMDb http://us.imdb.com/title/tt003514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B9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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