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피시 메모리 Goldfish Memory (2003)

2010.01.27 11:41

DJUNA 조회 수:4147


[골드피시 메모리]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인 중년의 대학교수 톰이 릴케의 시집과 함께 여자들을 꼬실 때 써먹는 단골 문장에서 따온 것입니다. 금붕어 기억력의 한계는 3초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심한 물고기는 어항을 한바퀴 돌 때마다 전혀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게 되겠지요? 사람들도 그런 게 아닐까요? 사랑과 이별이 얼마나 짜증나고 아픈 일인지 경험했으면서도 맨날 그걸 까먹고 그 귀찮은 모험에 달려드는 걸 보면 말이에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금붕어들처럼 기억력이 나쁜 더블린 사람들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톰의 여자친구인 클라라가 톰과 톰의 학생인 이졸드의 키스 장면을 목격하며 시작됩니다. 클라라는 당장 톰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성 패트릭 축일 시위 때 우연히 만난 TV 기자 앤지와 데이트를 시작합니다. 한 편 톰은 이졸드에게 오래간만에 진지한 감정을 느끼지만 이졸드에게 이 모든 건 그냥 가벼운 장난일 뿐이죠. 또 한 편 앤지의 단짝 친구인 레드는 우연히 만난 데이빗과 사랑에 빠지는데 데이빗에게는 이미 로지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로지는 데이빗과 헤어진 뒤 톰의 동료인 래리와...


앞으로도 한참 남았습니다. :-) [골드피시 메모리]는 더블린 남부에 사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깨어지고 재결합하는 동안 만들어지는 연애의 사슬이 그물처럼 얽히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정말 다이크 드라마가 따로 없어요. 레즈비언들만 나오는 게 아닐 뿐이지.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이나 캐리커처입니다. 이들이 얽히는 이야기들도 얄팍하기는 마찬가지. 상관없어요. [골드피시 메모리]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이야기들의 깊이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엮어 경쾌한 리듬의 큰 그림을 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주제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로맨티시즘을 폭로하는 것이죠. 이 영화의 메시지는 동성애자이건 이성애자이건,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며 그 때문에 어항 속의 금붕어들처럼 끝도 없이 같은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경쾌하고 빠르고 귀엽습니다. 캐릭터들이 얇다고는 해도 영리한 각본과 능숙한 배우들에 의해 유쾌한 개성을 물려받고요. 흐르는 세월을 방심하고 있다가 연타를 얻어맞는 톰이나 쉽게 상처받는 결백한 로맨티시스트 앤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난 데이트 기회를 활용하느라 정신없는 클라라는 여전히 단순한 사람들이지만 적당한 역할을 주고 섞어놓으면 효과가 꽤 괜찮단 말이죠. 종종 지나치게 쿨해지려고 하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건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꽤 정확한 방법일 겁니다.


디지털 비디오로 찍은 영화이고 종종 영화는 어쩔 수 없는 매체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영화가 부드러운 갈색조로 찍어낸 더블린은 놀랄만큼 화사하고 예쁘며 현대적입니다. 뒤에 깔리는 부드러운 라틴 음악조의 OST도 그런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돋구어주고요.


아일랜드 비평가들은 [골드피시 메모리]를 카푸치노 영화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은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실 때처럼 이 영화가 제공하는 도회풍의 달콤씁쓸한 향을 가볍게 즐기고 극장에서 나오면 됩니다. 그것만 해도 괜찮은 오락이지요. (03/10/27)


★★★


기타등등

왜 여자들의 키스신이 나오는 동안은 쥐죽은 듯 조용하던 관객들이 남자들이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킥킥 웃어대기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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