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 Kôrei (2000)

2010.02.03 18:36

DJUNA 조회 수:11000


[강령]의 주인공은 음향 엔지니어인 카츠히코와 그의 아내 준코입니다. 준코는 약간의 영매 기질이 있어서 가끔 강령술을 열기도 하죠. 어느 날, 준코는 경찰로부터 유괴된 소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하필이면 그 소녀는 부부의 차고 안에서 발견됩니다. 유괴범한테서 달아나던 소녀가 음향 채집을 나갔던 남편의 가방 속에 숨었고 남편은 그걸 그냥 집까지 가져온 것이죠. 아이는 그 때까지 살아있었으니, 그냥 경찰에 신고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물론 그들이 그렇게 올바른 길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강령]은 브라이언 포브스가 감독한 1964년 영국 영화 [비 오는 오후의 음모 Seance on a Wet Afternoon]의 리메이크작입니다. 포브스의 영화는 또 마이클 맥셰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것이고요. 맥셰인의 소설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물론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대로 원작을 현대 일본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포브스의 영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리메이크 버전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하나 있죠. 장르 말입니다.


[비 오는 오후의 음모]는 기본적으로 어두운 사이코 스릴러입니다. 킴 스탠리가 연기하는 마이라는 진짜 영매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여자에 불과하죠. 유괴사건 역시 마이라와 마이라의 남편 빌이 마이라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꾸민 음모입니다. 영화는 불길하고 비정상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지만 정말로 초자연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강령]은 진짜 귀신 영화입니다. 준코는 진짜 능력있는 영매입니다. 유령들 역시 진짜 존재하고요. 유괴 역시 그들이 꾸민 짓이 아니에요. 준코는 정말로 자기 능력을 이용해 아이를 찾아냅니다. 중간에 쓸데없는 짓을 해서 심각한 결과를 자초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 영화를 전형적인 일본식 귀신들로 가득 채웁니다. 물론 대부분 여자들이거나 아이들이고 얼굴은 머리칼로 가려져 있거나 흐릿하게 블러 처리가 되어 있지요. 가끔 몸은 보이지 않으면서 팔만 상대방의 몸에 걸치는 식으로 초자연적인 등장을 하고 가방에서 기어나와 주인공의 몸에 손자국을 찍기도 합니다.


장르가 옮겨지자 주제도 바뀌었습니다. 전작의 주제가 범죄자들의 이상심리였다면, [강령]의 주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갈망과 죄의식입니다. 카츠히코와 준코는 대단한 욕심이나 악의 따위는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종종 한심할 정도로 바보스럽고 꿔서는 안되는 꿈을 꾼다는 것뿐이죠.


여기서부터 [강령]의 이야기는 60년대 영국을 떠나 21세기의 일본 현대 사회에 이식됩니다.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귀신들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는 특별히 불편하지 않지만 앞뒤로 꽉 막혀있는 일본 중산계급의 삶이지요. 준코가 벗어나려고 하는 건 물질적 빈곤이 아니라 '재미없게 살다가 죽으면 끝인' 희망없는 따분한 삶입니다.


물론 그들은 탈출하는 데 실패합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마음이 약하고 하는 짓들도 서투르거든요. 그들은 프로페셔널한 범죄자들처럼 자기네들이 저지른 죄와 실수들을 쉽게 망각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귀신과 커플로 다니는 죄의식에게 스토킹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맥베스 부부처럼 말이에요. [강령]은 [비 오는 날의 음모]보다 훨씬 [맥베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강령]의 이야기가 끔찍한 건, 우리의 주인공들이 어쩌다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고통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화가, 그들이 '지루하고 평범한 삶' 이상을 꿈꾸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범죄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카츠히코와 준코가 겪는 공포담의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경고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너네들은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어. 조금이라도 트랙에서 벗어난다면 당장 지옥에 던져버릴 거야." (04/04/08)


★★★


기타등등

중반 이후 십 여분 동안 자막이 대사보다 10여초 늦는 일이 있었답니다. 개봉 전까지는 수정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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