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Hyazgar (2007)

2010.01.31 23:08

DJUNA 조회 수:6032


[경계]의 남자 주인공 항가이는 몇 년째 사막화가 지속되는 몽골의 마을에서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암만 봐도 지는 싸움인 게 분명한데, 그래도 그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도망가는 것보다 뭐라도 하면서 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그런 고집 때문에 사막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묘목들은? 거기에 대해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면 그는 혼자가 됩니다. 아내가 귓병을 앓고 있는 딸을 치료하기 위해 울란바토르로 갔거든요. 하지만 그는 외로울 틈도 없습니다. 가족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에서 탈출한 최순희라는 여자가 아들 창호를 데리고 그의 집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하룻밤 머물고 떠날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항가이의 집에 주저앉게 됩니다. 말도 한 마디 안 통하면서 그들은 일종의 대안 가족을 형성하게 되지요.


장률이 [경계]에서 그린 몽골 사람들의 묘사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도 이 세계에서는 외국인이니까요. 몽골이라는 나라를 택한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나라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고요. 영화의 테마가 된 나무 심는 남자 이야기는 거기서 꽤 유명하다고 하던데 영화가 그 이야기를 정통으로 다룰 생각이 없다는 건 자명해보이고.


[경계]는 중국 아트 하우스 영화의 표준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느리고 신중하고 클로즈업을 삼가고 말수가 적지요. 캐릭터들은 마치 19세기 상징주의 연극에서처럼 모호하고 시적인 행동을 일관하고요.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를 껴안으면 여자는 남자를 밀쳐내고 우리로 뛰어들어 양 한 마리를 죽여 그 시체를 끌어나옵니다. 정상적인 세계에서는 애꿎은 양을 죽이는 대신 먼저 고함이라도 지르겠지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전 이런 아트 하우스 주인공들의 행동이 좀 갑갑합니다. 최순희가 해야하는 가장 상식적인 행동은 고비 사막 변경까지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일단 중국 국경을 넘어서면 어떻게든 울란바토르 남한 대사관에 연락을 해서 망명신청을 해야죠. 어쩌다가 항가이의 집 앞까지 실수로 흘러들어왔다고 해도 일단 대화를 시도는 해야합니다. 북한과 몽골의 영어 교육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자기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리지 못할 정도로 갑갑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라디오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는 거죠. 아악, 갑갑해!


하지만 서부극 세계에 서부극 세계의 논리가 있는 것처럼 아트 하우스 영화에도 아트 하우스 영화의 논리가 있습니다. 메테를링크 희곡의 주인공들이 맥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는 걸 탓할 필요 없듯이 [경계]의 주인공들이 자기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걸 트집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전히 저는 갑갑하지만 그게 나은 선택인 것 같아요. [경계]에서도 몇몇 메시지나 은유가 지나칠 정도로 명쾌해서 내용에 일부러라도 약간의 중의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굶주림 때문에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자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대포동 미사일이나 만들고 있는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은 그냥 노골적이잖아요. 라디오까지 동원해서 직접 이야기하는 걸요.


물론 정말 그런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경계]의 매력은 "우리는 누가 보호해주나요?"와 같은 직설적인 대사들이 나올 때보다 하려는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어진 재료들을 무덤덤하게 늘어놓을 때,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 재료들의 의미가 조금씩 엇갈리거나 충돌할 때 발생합니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고 '사람들 사이의 경계'나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해석을 내놓으면 그게 오히려 재미없게 느껴지죠. 특히 무척 아름다운 영화의 결말은 해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군요. (08/02/21)


★★★


기타등등

영화 내내 서정이 신고 있는 하얀 운동화에 신경이 쓰이더군요. 전 신발 페티시 같은 건 없어요. 그런데 그 날은 그게 정말 예뻐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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