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세계 A World Apart (1988)

2010.02.06 22:03

DJUNA 조회 수:21118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판한 영화들이 유행처럼 만들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였지요. [자유의 절규], [드라이 화이트 시즌], [파워 오브 원], [보파!]와 같은 영화들이 모두 그 무렵 나왔습니다. 그 유행이 다시 오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시스템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에 죽었으니까요. 93년에 나온 일레인 프록터의 [친구들]만 해도 벌써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바라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언제나 어색하게 생각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백인이었어요. 심지어 스티브 비코의 삶에 대한 영화여야 마땅했던 [자유의 절규]에서도 주인공은 백인 저널리스트 도널드 우즈였고 클라이막스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흑인 감독인 유잔 팔시가 감독한 [드라이 화이트 시즌]도 마찬가지. 예외라면 모건 프리먼의 감독작인 [보파!] 정도인데, 93년작인 이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가 흑인이 주인공인 몇 안 되는 아파르트헤이트 영화라는 것 때문이었으니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던 거죠. 하긴 영화계라는 곳이 처음부터 그렇게 단순한 데가 아니지만요.


크리스 멘지스의 감독 데뷔작인 [갈라진 세계]에서도 주인공은 백인입니다. 요하네스버그의 안락한 중산층 동네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백인 소녀지요. 하지만 다소 기형적인 백인 중심 아파르트헤이트 영화인 [자유의 절규]나 [파워 오브 원]과는 달리, [갈라진 세계]의 선택은 완벽합니다. 일단은 영화 전체에 녹아있는 강한 개인적인 느낌 때문일 거예요. 이 영화는 각본가인 숀 슬로보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슬로보의 부모인 조 슬로보와 루스 퍼스트는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인권운동가들이었고요. 루스 퍼스트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5년 전인 1982년에 남아프리카 정부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폭탄 소포를 받고 죽었습니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63년입니다. 'The 90-Day Detention Law'가 막 발효된 때지요. 주인공 몰리의 아버지 거스 로스는 이미 망명했지요. 엄마인 다이애나 로스는 막 그 법에 걸려 90일 동안 구금되었고요. 말이 90일 구금이지, 실제 상황은 훨씬 험악합니다. 변호사나 가족을 만날 권리도 박탈당하고 90일이 끝나면 석방시키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다시 체포할 수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거의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반테러 정책의 일부로 이걸 추진하려 했던 모양이네요?)


로스 집안 사람들은 아파르트헤이트 밑에서 남아공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백인이고 저명인사니까요. 이 영화에서 가장 심한 일을 겪는 사람은 로스 집안 사람들이 아니라 그 집 흑인 가정부 엘시의 동생이고 인권 운동가인 솔로몬 마부사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당시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갈라진 세계]가 여전히 힘있는 영화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최악의 상황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몰리가 겪을 수 있는 경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몰리에겐 세상 밖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인권탄압보다는 댄스 경연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친구를 잃는 것이 더 끔찍한 일이죠. 우선 순위는 분명 어긋나 있지만 그 어긋남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엘시와 솔로몬의 이웃들이 정부와 경찰의 노골적인 폭력과 탄압에 시달리는 동안, 몰리의 세계는 천천히 말라붙어 갑니다. 이전엔 몰리의 삶도 썩 괜찮았어요. 하지만 엄마가 체포되고 아빠가 망명한 뒤로 사정은 달라집니다. 단짝 친구는 떨어져 나가고 학교는 지옥이 되고 가족은 분열되며 주변의 조롱과 멸시는 심해집니다. 그렇다고 엘시나 솔로몬이 속해 있는 흑인 사회에 들어간다고 해서 맘이 편해지는 건 아니에요. 그 세계에서도 몰리는 어쩔 수 없는 타자거든요.


여기서부터 [갈라진 세계]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비판을 넘어선 보편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한 동안 미친 것처럼 좋아했던 것도 이 작품의 성장물 요소 때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진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이 영화가 여전히 저에게 욱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거고요. 이 영화에서 몰리가 겪는 소외감과 성장통은 세상 어느 곳에 대입해도 먹힙니다. 그건 정말 보편적인 외침이었어요.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또다른 부분은 몰리와 엄마 다이애나의 관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몰리가 다이애나를 바라보고 회상하는 방식이지요. 곧장 말해, 다이애나는 좋은 엄마가 아닙니다.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고 존경받아 마땅한 인권운동가지만 아이들에게 자상한 엄마는 아니예요. 더 중요한 다른 일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는 있지만 원래부터 성격상 그런 타입이 아니었던 거죠. 몰리는 필사적으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거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두 사람은 간신히 서로에게 맘을 열지만 저에겐 그게 실제 사건에 대한 묘사보다는 슬로보 자신의 소망을 반영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쪽이건 상관 없어요. 이 영화는 훌륭한 사모곡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엄마였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사모곡이죠.


배우들을 언급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바바라 허쉬, 조디 메이, 린다 음부시는 이 영화로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습니다. 허쉬도 좋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디 메이의 영화입니다. 이 어린 배우의 커다란 눈을 떠올리지 않고 [갈라진 세계]를 기억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팀 로스와 데이빗 슈세의 얼굴을 발견하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06/01/09)


★★★★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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