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푸른 선 The Thin Blue Line (1988)

2010.01.31 11:07

DJUNA 조회 수:12312

 

사건 개요는 이렇습니다. 1976년 11월 어느 날, 랜달 데일 애덤스라는 남자가 데이빗 해리스라는 16세 소년이 모는 훔친 차에 탔습니다. 그 날 밤, 로버트 우드라는 순찰 경관이 우연히 세운 차에 탄 운전자에 의해 살해당했고 애덤스는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80년대 후반까지 살인죄로 복역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범인일까요? 진짜 살인범은 공공연한 범죄자 성향이고 사건 이후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던 데이빗 해리스가 아닐까요?

 

그게 이 영화의 감독 에롤 모리스가 품었던 의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립탐정이 된 기분으로 이 사건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애덤스와 해리스를 인터뷰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 주장의 신빙성을 확인하고 사건을 재현하고 행동 동기를 찾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게 이 영화 [가늘고 푸른 선]입니다. 결과는? 증거들은 재검토되었고 애덤스는 풀려났습니다. 다른 사건으로 체포된 해리스는 사형에 처해졌고요. 영화쟁이들이라면 모두 흐뭇해 하며 회상하고 싶어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영화가 정말로 세상 밖으로 나와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가늘고 푸른 선]이 그렇게 설득력 있는 영화였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보고 있으면 화가 나요. 애덤스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체포되고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재판받고 복역했으니까요. 모리스는 영화 내내 차분하게 경찰과 검찰의 무성의한 수사 방식을 폭로하고, 왜 애덤스를 지목한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는지, 왜 해리스가 애덤스보다 더 가능성 높은 용의자인지 관객들에게 설명합니다.

 

영화는 아름답기도 합니다. 절반 이상이 관계자들의 대갈치기 인터뷰인 영화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요. 모리스가 당시 사건을 배우들을 이용해 재현하고 적절한 관련 이미지로 빈 자리를 채우는 방식엔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물론 필립 글래스의 최면을 거는 듯한 담담한 음악도 한 몫을 했고요.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절실한 이슈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추상적인 퍼즐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풍기죠. 이게 꼭 옳은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의 장점들보다는 단점들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재미있는 건 그 단점들이 장점들만큼이나 흥미로운 요소들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모리스는 이 영화에서 얼마나 객관적일까요? 그게 조금 기만적입니다. 우린 모리스가 처음부터 애덤스의 무죄를 믿고 있다는 걸 압니다. 이야기 전개가 처음부터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레이션 없이 편집과 재현만으로 진행되는 모리스의 이 차분하고 순수한 스타일은 가공의 객관성이라고 할만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관객들을 마치 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터뷰 대상의 얼굴과 대화에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려 하는데, 그러다 결국 모리스가 처음부터 마련해둔 시나리오 속에 빠지게 되는 거죠. 결코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모리스가 과연 우리에게 정보를 충분히 주긴 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애덤스의 무죄와 해리스의 유죄를 백 퍼센트 확신할만한 증거는 얻지 못합니다. 그 중 일부는 사건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애덤스의 '블랙아웃'에 대한 부분은 보다 상세히 다루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렵지도 않았어요. 그냥 애덤스나 변호사에게 추가 질문을 해서 담으면 되었으니까요.

 

모리스가 예술적 성취도와 다큐멘터리의 본래 기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도 느껴집니다. 분명 그는 이 작품을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 스타일은 관객들이 정보를 얻고 판단을 내리는데 종종 심각하게 방해가 되지요. 많은 예술적인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인터뷰 대상의 이름과 직책을 자막으로 알리는 통속적인 짓 따위는 하지 않는데, 그 때문에 관객들은 사건을 검토해야 할 시간 동안 지금 앞에 나와서 떠들고 있는 사람이 변호사인지, 검사인지, 배심원인지, 경찰인지를 짐작해야 합니다. 물론 이름까지 확인하려면 더 걸리고요.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을 무시한다고 해도 영화의 아름다움이 내용의 절실함을 방해한다는 느낌이 종종 들기도 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늘고 푸른 선]의 성취도는 큽니다. 애덤스는 풀려났고 영화는 아름답고 흥미진진합니다. 이 정도면 좋은 다큐멘터리가 도달해야 할 현실적 고지는 일찌감치 넘은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아직까지 미심쩍게 보이는 건 결국 매체 자체의 문제 때문이겠죠. (05/08/04)

 

★★★☆

 

기타등등

애덤스는 감옥에서 나온 뒤 모리스를 고소했습니다. 자기 이야기의 권리 때문이었다고 해요. 자세히는 저도 잘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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