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를 쫓아라 (1970)

2010.02.10 23:43

DJUNA 조회 수:3430


자료에 따르면 [그 여자를 쫓아라]가 '임권택의 제임스 본드 영화'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 영향을 조금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두 편의 오드리 헵번 주연 영화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샤레이드]와 [어두워질 때까지]요.


영화는 일단의 악당들이 초등학교를 습격해 안에 있던 두 사람을 쏴죽이고 숨겨져 있는 금괴를 탈취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타고 가던 차는 폭파되고 금괴가 든 상자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들고 사라지죠. 이들 중 아버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윤정희의 캐릭터 아미는 홍콩에서 아버지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그 뒤로는 김희라가 연기한 자칭 악당이 따라다니고요.


이 설정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샤레이드]라는 영화가 나왔잖아요. 의지 굳고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을 폭력이 가득 한 음침한 세계에 던져 놓고 그 대결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죠. 그러는 동안 로맨스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


하지만 현대 관객들에게 [그 여자를 쫓아라]는 결코 그런 재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윤정희가 연기한 아미 캐릭터가 부족한 게 가장 큰 단점이죠. 일단 일관성이 없습니다. 처음엔 마치 훈련받은 스파이처럼 권총 든 악당을 제압하더니, 영화 중반을 넘기면 기절한 인형처럼 끌려다니기만 하거든요.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액션이 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섹시하거나 위트 넘치거나 매력적인 인물도 아니랍니다. 그냥 당시 장르 영화 특유의 평범한 여자 주인공일 뿐이에요. 늘 김희라 캐릭터가 구해주어야 하는.


그렇다고 김희라 캐릭터가 매력이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현대 관객들이 견디기엔 지나치게 느끼해요. 당시엔 싸나이다움을 과시하는 멋들어진 행동이었던 것들이 요새 보면 상스럽고요. 게다가 이 친구는 뻔뻔스러운 강간범이에요. 이 영화의 베드신에서 이 친구는 아미를 강간한 것이나 다름없죠. 생각해 보니 제가 본 임권택 장르 영화들 중 강간이 안 들어간 영화가 없군요. 남자 주인공의 복수 원인을 제공해주거나 "여자도 알고 보면 좋아해" 논리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심하게 재수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능성 있었던 캐릭터는 장동휘가 연기한 아미의 아빠입니다. 꽤 복합적인 설정이어서 조금만 더 팠다면 상당히 근사한 악당이 나왔을 거예요. (스포일러 아닙니다. 장동휘가 악당이라는 것은 첫 장면에서 분명히 밝혀지거든요.) 하지만 미스터리가 워낙 엉성해서 간신히 설명만 따라가기에도 급한 각본에서는 그런 캐릭터가 빛을 발하긴 어렵죠. 오히려 이해 불능의 행동만 하는 괴상한 괴물이 되어 버렸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197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런 식의 영화를 만들 여건이 조성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여성 캐릭터와 액션, 로맨스를 조율하는 방식의 문제 때문이죠. 대상과 세상을 보는 눈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던 겁니다. 영화가 끝나자 제 앞에서 영화를 보던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이러시더군요. "임권택 감독이 지금 이 영화를 보면 얼마나 민망할까?" (05/12/20)


★☆


기타등등

김희라 아저씨는 요새가 낫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느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대로 된 세상에선 그런 느끼함은 공중위생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