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부인 (1969)

2010.02.19 10:48

DJUNA 조회 수:5604


1969년에 개봉된 최은희, 김지미 주연의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평판이 어땠는지 모르겠군요. 검색했지만 별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재미있게 봤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법정물은 본 적이 없어요. 음, 사실 법정물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죠. 법정 장면은 한 15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법정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 충분합니다.


영화는 최은희가 연기하는 중년의 변호사가 귀국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명성을 떨치다가 한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온 것이죠. 기자 한 명이 인터뷰를 하는데, 이 변호사는 이상한 이유로 자신의 과거의 경력에 대해 언급하길 꺼립니다. 여기서부터 이상하죠. 한국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자격증이 있기 때문에 피고를 변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당연히 한국 이름과 경력은 처음부터 공개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이 사람에겐 사연이 있습니다. 최은희는 사실 20년 전에 한국에서 변호사였어요. 일 때문에 집안일을 방치하는 동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젊디젊은 강부자 가정부가 키웠고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면서 점점 성격파탄자가 되어갔죠. 그러다 남편이 김지미와 바람을 피웠어요. 최은희는 김지미와 한 번 만나더니 남편에겐 당신이 더 잘 어울리겠다며 쿨하게 남편을 내줍니다. 사실 남편에게 별다른 애정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들을 버리고 가는 건 좀 죄책감이 느껴졌던 모양이지만. 하여간 최은희가 미국에 가 있는 17년 동안 김지미는 최은희의 남편과 살면서 최은희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정성껏 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엽총으로 남편을 쏴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겁니다.


여기서부터 전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최은희 변호사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7년 동안 떠나있는 동안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아들을 보고 싶었겠죠. 김지미의 인품을 아니 변호해주고 싶었겠죠. 재수없는 남편이 죽은 거야 쌤통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하지만 아들과 김지미는 도저히 이해불가입니다.


일단 아들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아빠가 죽고 엄마가 살인죄로 갇혀 있는데, 여자친구와 변호사를 데리고 불국사로 놀러가는 녀석이에요. 그러다 자기 연주회 도중 갑자기 충격을 받고 기절하기도 하고요. 도대체 일관성이 없어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60년대 한국 사람들이 이런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김지미의 캐릭터는 더욱 이해가 안 갑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감옥에 가야만 아들이 잘 된다고 믿는 모양이에요. 장르 상식으로 보면 진범은 아들이고 김지미가 그 죄를 뒤집어 쓴 것이어야 그게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아들은 그런 짓을 할 능력도 없는 애죠. 남편이 죽은 건 순전히 사고 때문이거든요. 그런데도 김지미는 죽어도 자기가 죽였대요. 최은희에 대한 이 사람의 입장도 괴상해요. 아들보고는 최은희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가라고 사정하면서 정작 최은희가 오면 내 아들을 빼앗아간다고 난리를 쳐요. 도대체 이 사람 뭐예요?


한 시간 동안 이 괴상한 사람들과 씨름한 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검찰측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검찰 아저씨 말에 따르면 김지미는 미모와 젊음을 이용해서 조강지처를 내쫓은 뒤 유산을 노리고 남자에게 시집왔대요. 그런데 남편이 잘 죽지 않자 엽총으로 살해하고 위장 자수를 했다는군요. 그러니 사형이 마땅하대요. 잠깐, 위장 자수? 어떤 게 위장 자수죠? 자기가 죽이지 않았는데 죽였다고 해야 위장 자수잖아요. 물론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사고사나 과실치사로 우기는 것도 위장 자수일 수 있겠죠. 하지만 김지미는 자기가 죽였다고만 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그럼 도대체 검찰측에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예나 지금이나...)


피고인의 짤막한 최후진술(“제가 죽였어요!”)이 끝난 뒤 변호인의 최후변론이 있습니다. 최은희 변호사는 사건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출세와 일에 눈이 먼’ 엄마 자격이 없는 전처가 버린 가정을 위해 정성껏 봉사한 여자라며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할 뿐이죠. 이게 안 먹히자 최은희는 자기가 바로 그 전처라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강부자 가정부를 피고측 증인으로 불러요. (네, 이 세계에서는 최후 변론 이후에 첫 번째 피고측 증인이 나옵니다.) 강부자 가정부는 김지미의 결혼생활에 대해 증언하는데, 듣고 있으면 김지미는 봉건시대 아낙네의 롤플레잉에 푹 빠져 있는 매저키스트 같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게 ‘착한 아내/엄마’의 증표인 거죠. 결국 살인사건 이야기도 나오는데, 한 동안 집을 비웠던 남편이 돈 대신 총을 가져가겠다며 난리치는 걸 아내가 막다가 일어난 사고였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 걸 왜 법정까지 갔답니까. 하여간 김지미는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자, 1시간 15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1시간 40분짜리예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그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은희는 그냥 미국으로 가려합니다. 아들을 데리고 가면 좋고 못 가도 어쩔 수 없죠. 이 모든 건 최은희가 이미 아들의 엄마라고 인정하는 김지미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겁니다. 하지만 김지미가 재판 이후에도 계속 다중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결국 최은희는 혼자 갑니다. 아들은 효자 노릇 한다면서 김지미 옆에 남고요. 김지미는 재판 이후 최은희에게 감사인사라도 한 번 제대로 했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여간 사이코 모자는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겁니다. 어쩜 그렇게 죽이 잘 맞는지. 단지 전 아내가 되어 그들 사이에 끼어들 여자친구가 걱정이 되더군요. (09/06/02)


★★


기타등등

그래도 김지미가 더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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