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 뒤에서 누군가가 제가 이 영화에 준 별 넷을 보고 키들거립니다. 하지만 왜요? 80년대에 나온 수많은 헐리웃 영화 중 [로저 래빗]만큼 멋진 오락과 경이를 동시에 제공해준 영화가 얼마나 됩니까? [로저 래빗]은 별 넷 가치가 있습니다.


2.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게리 K. 울프의 추리 소설 [누가 로저 래빗을 검열했나? Who Censored Roger Rabbit?]가 원작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소설에선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헐리웃의 실존 유명 인사들, 40년대 필름 느와르의 탐정들과 악당들이 태평한 척 하고 멋대로 어울리지요.


작가인 게리 K. 울프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헐리웃 인종 차별의 은유라고 합니다만, 정말 그런 식으로 먹히는 이야기로 쓰여졌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거든요. 속편이 하나 나오긴 했지만 그 역시 절판되었습니다. 울프의 소설을 각색한 제메키스의 영화에서는 그런 정치사회적 은유 같은 걸 찾을 수 없고요.


왜 절판되었냐고요? 글쎄요. 역시 안 봤으니까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소설보다는 영화에 더 잘 맞습니다. 만화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걸 직접 봐야 스토리의 황당함이 더 살아나니까요. 활자화된 상태에서 토끼는 그냥 보통 캐릭터로 남을 뿐입니다. 당연히 원작보다 영화가 훨씬 강한 이미지로 남아 원작 자체를 눌러 버리는 거죠.


3.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전형적인 40년대 하드 보일드 추리소설/필름 느와르의 스토리 라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터프한 주인공 사립탐정이 작아보이는 불륜 사건에 말려드는데, 그건 곧 살인사건으로 발전하고 그 살인사건도 알고 봤더니 더 큰 음모의 일부분이라는 것이죠. 당연히 이런 영화들에 끼어드는 뻔한 도구들이 삽입됩니다. 팜므 파탈, 거물 악당, 폭력적인 졸개들...


뻔한 이야기지만 따분하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 각본 자체가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로저 래빗]은 장르를 잘 아는 작가들이 공들여 쓴 작품입니다. 혼란스럽지만 그럴싸한 플롯과 클리셰의 능숙한 활용, 그리고 그 위에 살짝 덮힌 '포스트'한 느낌까지, [로저 래빗]의 스토리는 한 마디로 빈틈없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정말로 말도 안되는 '툰타운' 스토리가 입혀집니다. 40년대는 40년대인데, 만화 캐릭터들이 진짜 배우들처럼 설치는 헐리웃인 거죠. 필름 느와르의 익숙한 장르 속에서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오히려 더 확실하게 튑니다.


과연 이 두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일 수 있는 것일까? 제메키스의 영화에서는 됩니다. 일단 영화는 황당한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지해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밥 호스킨즈와 조애너 캐시디와 같은 인간 캐릭터들은 마치 만화 캐릭터들과 수 십 년을 함께 출연해 온 사람들처럼 그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입니다.


느와르 스토리에 덮힌 '포스트'한 느낌도 영화의 두 요소를 섞은 접착제가 됩니다. [로저 래빗]은 느와르의 스토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80년대의 시점에서 살짝 놀려대고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들 중 상당수는 겉보기 같지가 않습니다. 에디 발리언트는 겉보기만큼 터프하고 무표정한 사립탐정이 아닙니다. 로저 래빗이 전형적인 누명쓴 남자가 아닌 것 역시 당연하고요. 심지어 제시카 래빗 역시 보이는 것처럼 팜므 파탈이 아닙니다. 이 장르를 놀려대는 듯한 어조는 스토리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도입과도 슬쩍슬쩍 잘 맞아떨어져서 두 이질적인 요소 사이의 틈은 더 좁혀집니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매혹적인 것은 그 기술적 요소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만남은 그렇게 새로운 것도, 엄청난 첨단 기술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결합은 애니메이션 탄생 초기부터 있어왔지요. [로저 래빗]에 사용된 기술적 트릭들도 아주 새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 나왔던 수많은 특수 효과 영화에 비하면 [로저 래빗]의 특수 효과는 간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애니메이션 감독인 리처드 윌리엄즈입니다. 윌리엄즈의 손을 통해 영화 속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삼차원의 존재감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진짜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실사 물체를 집어 던지며 엄청나게 복잡한 카메라 워크 속을 자연스럽게 누비고 다닙니다.


[로저 래빗] 이후 이런 윌리엄즈의 테크닉은 나름대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쿨 월드]와 같은 아류작이 나왔고 많은 텔레비전 광고에서도 도입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로저 래빗]이 주는 비주얼의 경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질'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5.

[로저 래빗]의 성공 이후, 디즈니 사에서는 로저 래빗, 베이비 허먼, 제시카 래빗을 주연으로 내세운 세 편의 단편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들은 우리 나라에서도 상영되었습니다. [딕 트레이시]와 같은 디즈니 영화의 상영 전에 틀었거든요. 모두 스토리는 다소 진부하지만 리처드 윌리엄즈의 정신없는 테크닉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이 영화들은 미국에서 비디오로도 구할 수 있지요. (99/09/11)


★★★★


기타등등

여기도 제시카 래빗의 치마 밑을 보려고 LD를 프레임 별로 체크한 분이 계신가요? 


감독: Robert Zemeckis 출연: Bob Hoskins, Charles Fleischer, Kathleen Turner, Christopher Lloyd, Joanna Cassidy, Stubby Kaye


IMDb http://www.imdb.com/title/tt009643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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