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엘리사 Elisa, vida mía (1977)

2010.02.06 18:27

DJUNA 조회 수:308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 사랑 엘리사]는 엘리사라는 30대 여성이 막 수술에서 회복한 아버지 루이스를 방문하면서 시작됩니다. 아마도 루이스는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난 모양이고 그 이후로 둘 사이는 소원해진 것 같습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비교적 정상적이고 온화한 편입니다. 망가지는 결혼 생활에서 탈출해온 엘리사는 멀어진 아버지와 다시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엘리사는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는 학교를 방문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쓰는 글과 근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아버지와 함께 번역 작업을 하기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도입부에는 살짝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도입부에 나오는 엘리사의 나레이션을 엉뚱하게도 루이스 역의 페르난도 레이가 읊고 있거든요.


영화 중반에 가면 그 나레이션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루이스는 얼마 전부터 자신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자서전을 쓰는 대신 엘리사의 시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쓰고 있었죠.


여기서부터 사우라가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놓은 사실적인 드라마의 틀은 갑자기 무너집니다. 엘리사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일련의 평행 우주들을 형성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느 이야기가 '진짜'인지 이야기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진짜'에 가까운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중요한 건 겹겹으로 쌓인 이 이야기들이 루이스와 엘리사라는 두 까다롭고 우울한 캐릭터들에게 다양한 드라마들을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결코 끝에 가서 말끔하게 정리되는 종류는 아니지만요.


영화는 좀 차가운 편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영리함과 '예술적' 기교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루이스와 엘리사의 거의 근친상간적인 애증 관계는 강렬합니다. 제랄딘 채플린과 페르난도 레이 둘다 모두 기가 막힌 연기를 선보이고 있지요(레이는 이 영화로 칸느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야기가 완전히 설명되는 종류가 아니어서 오히려 두 배우들의 역할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기와 논리는 연기의 폭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형식적인 면에서 [내 사랑 엘리사]는 사우라의 영화들 중 가장 부뉴엘적인 작품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긴 사우라가 부뉴엘의 단골 배우인 페르난도 레이를 불러온 것 자체가 우연은 아니지 않겠어요? 또 모르죠. 루이스에 대한 엘리사의 애증이 부뉴엘에 대한 사우라의 감정과 연결되는 것인지도요. (03/03/26)


★★★☆


기타등등

1. 휴우, 드디어 올렸습니다. 4년 전에 한 약속이지만 지키긴 지킨 거죠?


2. 아나 토렌트는 엘리사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회상 장면과 사진에서만 잠시 등장합니다. 여전히 예쁘긴 참 예뻐요.


3. 이것으로 토렌트와 채플린의 공연은 끝났을까요? 아뇨. 올해 서울 여성 영화제에서 상영될 [달의 표정들]에서 또 같이 나온답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