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 Dogville (2003)

2010.02.07 10:02

DJUNA 조회 수:10474

 

(스포일러가 있어요.)

 

Oh keep the Dog far hence, that's friend to men, 
Or with his nails he'll dig it up again!

--TS Eliot, "The Waste Land"

 

1.

전 이전에도 극장주의 테크닉을 도입한 연극을 영화로 각색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슬슬 브로드웨이 뮤지컬 각색 유행이 부활하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이 주제는 한동안 우리 주변에 머물겠지요. 자, 다시 한 번 질문을 정리해보죠. 사실적인 연극을 영화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대라는 공간과 연극이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극도로 밀어붙인 극장주의 연극들을 영화로 옮기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결책은 영화화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히트 연극을 기록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녹화된 연극을 텔레비전 중계로 보는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이 영화라는 독립적인 예술이 되기를 포기하고 단순히 무대 공연을 보존하는 실용적인 중간자 역할에 머물렀다고 이해할 것입니다. 여기서 시청자들이 하는 일은 프로그램을 그대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간자로 삼아 실제 공연을 유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 작품들이 작가들이 의도한 대로 머물 필요는 없다는 거죠. 연극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품이라고 해도 그 녹화 과정에서 영화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은 미장센과 편집이고 이것들은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무대 공간의 녹화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히치콕은 영화 전체를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찍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연극 무대가 특별히 덜 영화적인 장소일 이유가 있나요? 게다가 우린 성공적으로 무대를 영화적 공간으로 옮긴 작품들을 알고 있습니다. 잉마르 베리만의 [마술 피리]는 어떤가요?

 

2.

라스 폰 트리어의 [도그빌]과 베리만의 [마술 피리]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베리만은 존재하는 무대 공연을 영화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도그빌]은 각색물이 아니라 연극 공연을 녹화한 것처럼 위장한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프롤로그와 9장으로 구성된 이 가짜 연극은 브레히트식 서사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손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를 폰 트리어식으로 각색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폰 트리어는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요? 인터뷰를 들어보니 그는 원래부터 이런 연극 공연 중계 프로그램을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형식은 절대로 아니니 이런 일탈로 관객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놀라게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똑똑한 십대들한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심술 때문일 겁니다. 전 언젠가 폰 트리어가 영화 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인터뷰를 읽은 적 있어요. 아마 교수가 자막으로 날짜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달력이나 뭐 그런 걸 비추어서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게 더 영화적이라고 말했던 모양이에요. 폰 트리어는 그 고생을 하느니 그냥 자막을 넣겠다고 생각한 모양이고요. 하긴 맞는 말이에요. 영화적 순수성을 지키느라 쓸데없는 노력을 하느니 덜 영화적이더라도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는 게 낫겠죠. 아마 폰 트리어는 영화 교수들이 생각없이 되풀이 읊어대는 '영화적 순수성'의 가치에 정면 도전하고 싶었을 겁니다. 영화적이 아니라고? 웃기지 마. 이런 식으로도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줄테니 한 번 보란 말이야.

 

폰 트리어의 얄팍한 치기야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그의 의도를 깊이 따지지는 말기로 하죠. 우리가 대답해야 할 건 다른 것입니다. 그의 실험은 성공했나요? 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이 영화의 연극성 때문에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연극적인 세트 역시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요. 오히려 디테일이 삭제된 배경 때문에 배우들에게 더 시선이 집중되고 빈 공간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텅 빈 벽은 도그빌 시민들의 우행을 그 어떤 영화적 테크닉보다 효과적으로 노출시키고요. 우리가 텅 빈 무대 공간에서 진행되는 손튼 와일더의 연극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면 폰 트리어의 [도그빌]을 보면서 감동을 받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이런 접근법은 [도그빌]이라는 작품의 성격과도 맞습니다. 나중에 보다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작품은 거의 제의화된 수난극입니다. [도그빌]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성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방식입니다. 비현실적인 무대 세트와 공간은 오히려 영화의 상징주의를 강화시키지요.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성공은 다른 데 있습니다. 폰 트리어가 무엇을 의도했건 [도그빌]은 여전히 상당히 영화적인 작품이란 말입니다. 이 영화가 지독하게 연극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도그빌]이 덜 영화적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사용하는 수법들은 모두 영화적입니다. 클로즈업이나 들고찍기, 점프 컷, 부감촬영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의심이 나신다면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어땠는지 한 번 돌이켜 보세요. 가끔 보이지 않는 문을 여닫고 존재하지도 않는 구즈베리를 따는 척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연기는 생각외로 연극적이 아니었어요. 그건 보이지 않는 배우처럼 배우들 주변을 맴도는 폰 트리어의 카메라가 이들에게 과장되지 않고 사방으로 던져지는 영화적 연기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린 '영화적인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존 허트의 긴 나레이션을 들으며 "이건 영화적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나레이션이 효과적인 위트와 냉소로 가득 차 있고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의 우행과 정확한 대위법을 이루며 관객들을 자극한다면 왜 그게 영화적이 아니죠? (적어도 [도그빌]의 나레이션은 연극보다 영화에 더 잘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비사실적인 무대 세트를 보며 영화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영화가 사실성만 추구하는 장르였단 말이에요? 하늘에서 영화신이 내려와 그러라고 하던가요?

 

3.

[도그빌]의 배경은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무대는 로키 산맥에 위치한 도그빌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그레이스라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갱단에게 쫓겨 들어오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작가 지망생이자 동네 철학자인 톰 에디슨은 그레이스에게 매료되고 그녀를 숨겨주자고 동네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고 그레이스는 곧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갱단의 위협과 상금의 유혹이 점점 짙어지자 그레이스에 대한 이들의 감정과 행동은 점점 변해갑니다.

 

[도그빌]의 암담한 분위기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라스 폰 트리어는 이전에도 [브레이킹 더 웨이브]나 [어둠 속의 댄서]와 같은 영화들에서 매정한 집단에 의해 희생되는 성녀와 같은 여자 주인공들의 무지막지한 수난극들을 그려보인 적 있죠. 도그빌의 주민들에게 노예처럼 학대당하고 강간당하고 모욕받는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베스 맥닐이나 셀마 예스코바의 수난과 아주 닮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두 영화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정말로 '수난극 Passion play'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도그빌과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창세기]와 네 편의 복음서, [요한 계시록]에서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빌려왔다는 걸 알 수 있죠.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은총)는 타락한 지상에 내려온 천사이거나 예수입니다. 도그빌 사람들이 그레이스에게 강제로 채운 사슬과 족쇄는 십자가 상징이고요. 나중에 그레이스의 아버지로 밝혀지는 갱단 두목은 냉정하고 잔인한 구약의 신입니다.

 

영화의 결말도 앞의 두 편과는 달리 성서적인 파국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는 베스나 셀마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자신을 모욕하고 겁탈하고 폭행한 도그빌을 가차없이 처단합니다. 도그빌의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도그빌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 속에서 사라집니다.

 

이 결말은 그레이스의 복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수가 아니라 처벌이고 청소입니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그레이스와 아버지의 대화는 이 점을 명백히 합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 결점투성이 인간들의 존재를 옹호하고 그들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엄격한 질서와 단죄가 먼저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말지요.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는 복수심에 찬 피해자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관입니다. 도그빌 시민들이 처형당한 건 그레이스를 학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학대 과정 중 존재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정말로 기독교적 우화로 생각한다면 모든 게 쉽게 풀릴 것입니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어가 기독교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을 리는 없습니다. 덕택에 영화의 메시지는 생각외로 복잡해집니다.

 

우선 우린 폰 트리어가 도그빌의 시민들을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점투성이이고 어리석지만 악마들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레이스에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는 건 그들이 그녀의 정체를 읽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고 집단 속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둔하고 뻔한 협박에 겁에 질릴 정도로 겁쟁이들이고 눈 앞에 놓인 유혹에 쉽게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집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일까요? 전 쉽게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도그빌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지만, 저만 해도 최근에 스케일만 작을 뿐 이와 아주 비슷한 집단 행동을 목격한 적 있으니 말이죠. 비평가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는 보통 사람들의 집단은 종종 도그빌 사람들처럼 무시무시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자칭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얼치기 동네 사상가인 톰 에디슨은 바로 그 노골적인 표적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지만 바로 그 가당찮은 믿음 때문에 자신과 마을 사람들 모두를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이 한심한 친구의 이야기는 쉽게 보편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레이스가 베스나 셀마처럼 희생되었다면 교훈은 명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레이스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을 단죄하지요.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 영화는 도덕적 결벽증에 걸린 파시스트들처럼 가치없는 자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들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도그빌 사람들로,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레이스의 단죄일까요?

 

이 영화가 폰 트리어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미국 삼부작]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의심은 더욱 짙어갑니다. 사실 데이빗 보위의 [Young Americans]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대공황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기록 사진들을 나열하는 엔드 크레딧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엔 구체적으로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 말이에요. 그러기엔 이야기가 너무 보편적이잖아요. 당연히 우린 이 영화가 9/11 사태 이후에 만들어진 미국 비판물이라는 걸 계산에 넣은 뒤 은유를 해석하게 되고 그 결과 영화의 성서 비유가 거꾸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폰 트리어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비겁한 유보 같지만 그걸 알려면 다음 두 편의 영화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 할 겁니다. 그가 만든 이전의 삼부작들과는 달리 이번 [미국 삼부작]은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이어지는 이야기니까요. 적어도 제2편인 [맨덜레이]가 나오면 이 뻔뻔스러운 덴마크 남자의 시꺼먼 심보가 드러날지도 모르죠.

 

4.

[도그빌]의 캐스팅은 막강합니다. 니콜 키드먼, 제임스 칸, 벤 가자라, 로렌 바콜, 하리에트 안데르손, 필립 베이커 홀, 클로에 세비니, 스텔란 스카쉬고드, 폴 베터니, 패트리샤 클락슨...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놓은 걸 보면 이 친구도 참 능력있죠. 심지어 거의 대사없는 단역들로 장-마르크 바와 우도 키에르를 기용할 정도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낭비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앙상블 중심의 작품도 아니고 키드먼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아주 단순한 캐릭터들만 배정받았으니 말이에요. 그러나 이들의 연기는 낭비되는 경향이 있긴 해도 모두 좋습니다. 조연들 중 제 맘에 가장 들었던 배우는 매정하고 가차없는 베라를 연기한 패트리샤 클락슨이었지만 말이에요. 점점 좋아지는 배우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배우는 역시 주인공 그레이스를 연기한 니콜 키드먼입니다. 우선 캐스팅 자체가 완벽해요. 키드먼의 약간 신경질적인 연기는 연극적인 배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이 사람이 가진 할리우드식 아름다움은 캐릭터의 성스러운 아우라로 전환됩니다. 키드먼의 연기는 드라마틱하지만 뜻밖에도 과시적이지 않고 캐릭터가 느끼는 고통은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오히려 화려함을 걷어간 이 소박함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스케줄 때문에 다음 두 편에 나오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차라리 여기서 니콜 키드먼/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이미지의 배우들을 기용해 나머지 두 편을 찍는 것도 괜찮은 시도가 될 수도 있겠지요. 어차피 사실성은 포기한 영화니까 말이에요. (03/08/05)

 

★★★☆

 

기타등등

1. 원래 베라 역은 캐트린 카트리지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병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대요. 카트리지는 그 뒤 사망했고 이 영화는 그녀에게 헌정되었습니다.

 

2. 이 영화에서 도그빌 사람들이 가장 얄미워 보일 때는 그들이 그레이스를 겁탈하고 폭행할 때가 아니라 한참 피곤해하는 그레이스 옆에 붙어 자는 걸 방해할 때였답니다. 세상에 졸린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처럼 나쁜 일도 없어요.

 

3. 라스 폰 트리어는 이 영화를 찍은 뒤 미국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미국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 있느냐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라스 폰 트리어는 할리우드 사람들이 카사블랑카에 가보고 [카사블랑카]를 찍었겠냐고 반박했지만 그렇게 좋은 답변 같지는 않더군요. [카사블랑카]는 카사블랑카에 대한 영화가 아니고 할리우드가 무슨 짓을 했건 그의 선택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되지 못하니까 말이에요.

 

저보고 말하라면 한 특정 국가에 대한 추상적인 상징극을 쓰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몇 년이건 살아봐야 한다고 할 겁니다. [도그빌]은 강렬한 영화지만 그것도 이 영화가 미국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감독: Lars von Trier 출연: Nicole Kidman, Paul Bettany, Patricia Clarkson, Philip Baker Hall, Harriet Andersson, Lauren Bacall, Blair Brown, James Caan, Jeremy Davies, Ben Gazzara, Zeljko Ivanek, Chloë Sevigny, Stellan Skarsgård, Jean-Marc Barr, John Hurt, Udo K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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