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Dracula (1958)

2010.02.16 00:26

DJUNA 조회 수:5761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해머 버전 [드라큘라]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드라큘라]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견에 무조건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치가 맞는 생각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술적 가치나 역사적 중요성은 [노스페라투]가 더 높겠지만 그 작품은 진짜 드라큘라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독특합니다. 벨라 르고시가 주연한 유니버설 버전 [드라큘라]는 인상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아직 어설픈 부분이 너무 많고요. 해머 영화 뒤에 나온 작품들 중에도 경쟁자는 많지 않습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 정도가 눈에 들어올 뿐이지요.

 

해머 버전 [드라큘라]는 가장 중요한 [드라큘라] 영화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해머 영화이기도 합니다. '[드라큘라]가 해머 영화의 최고 걸작이다'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이 작품이 해머 영화와 60년대 공포 영화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머 버전 [드라큘라]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영화는 원작을 극도로 간소하게 줄여놨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조나단 하커는 드라큘라 백작의 사서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하커는 드라큘라를 처치하러 온 반 헬싱의 제자죠. 드라큘라는 하커를 제거하고 하커의 약혼녀 루시를 희생자로 삼습니다. 반 헬싱과 루시의 오빠 아서 홈우드는 루시의 복수를 위해 드라큘라를 사냥하고요.

 

원작 소설은 트란실바니아에서부터 영국까지 커버하는 대작이지만 영화는 중부 유럽의 작은 도시로 무대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홈우드니 하커니 하는 친구들은 아마 독일에 사는 영국인인 모양이고 드라큘라의 성도 그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버스 몇 정거장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나 봅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차이는 드라큘라의 묘사입니다. 벨라 르고시가 연기한 장엄한 악당에 익숙한 관객들은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 등장할 때 아주 당황하게 됩니다. 그는 예의바르고 정중한 남자로, 괜히 손님을 겁주려고 쇼를 하지는 않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드라큘라 백작이 믿음직한 신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깔끔하고 정중한 태도는 일단 흡혈귀의 본성을 드러내면 백퍼센트 바뀝니다. 위에 올린 사진을 보세요.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그 엄격한 신사의 얼굴 뒤에 저렇게 끔찍한 괴물이 숨어 있었던 겁니다. 당시 관객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을 거예요.

 

일단 스토리가 궤도에 오르면 진짜 주인공인 반 헬싱 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과학자이며 믿음직한 투사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드라큘라가 원작에 비해 훨씬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안개가 되어 사라지지도 못하고 박쥐나 늑대로 변신하지도 못합니다) 반 헬싱 박사의 과학자다운 모습은 설득력이 아주 강합니다. 해머 버전 [드라큘라]는 그 어떤 드라큘라 영화보다도 결투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인데, 그건 반 헬싱의 캐릭터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드라큘라]는 날씬하기 그지 없는 영화입니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장엄하고 거창한 분위기에 속아 상당한 대작으로 착각했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참으로 작은 소품입니다. 세트도 얼마 없죠, 배우 수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지요, 러닝타임도 짧죠...

 

영화는 빠릅니다. 하지만 성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80분을 살짝 넘기는 러닝 타임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는 작품이지요. 쓸데 없는 대사나 장면은 하나도 없는 영화입니다.

 

그런 신속함은 [드라큘라]에 독특한 스타일을 부여합니다. 스토리에 녹아 있는 폭력적 느낌과 해머 영화 특유의 거창함이 이런 간결함과 결합하다보니 전체적으로 영화의 밀도가 아주 높아졌습니다. 덕택에 장면 장면들은 실제로 벌어지는 액션보다 더 강렬해졌습니다. 유명한 드라큘라의 죽음 장면을 보세요. 일어나는 일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하지만 직접 영화를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거든요.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이라는 두 배우의 불꽃 튀기는 연기 역시 영화에 힘을 보태줍니다. 둘 다 굉장한 상대입니다. 이들의 대결 장면에 비하면 기관총을 든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은 전쟁 놀이 하는 애들 같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흡혈귀 영화들이 나올 것이고 그들 중 몇 편은 해머 버전 [드라큘라]보다 더 흥미진진한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영화가 쉽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머의 [드라큘라]는 그 자신의 개성을 하나의 모델로 고정시킨 드문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에 도전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01/09/12)

 

★★★

 

기타등등

이 영화의 미국 제목은 [Horror of Dracul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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