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시스 Tesis (1996)

2010.02.06 19:57

DJUNA 조회 수:6677

 

1.

매스미디어의 폭력에 대한 논문을 쓰는 대학생 앙헬라는 우연히 스너프 영화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얻게 되고 폭력 영화에 미친 대학생 체마와 함께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영화 속에서 살해된 여자와 아는 사이였던 보스코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계속 드러나는 증거들은 엉뚱하게도...

 

2.

[스크림]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영화 모두 영상 매체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니까요. 모두 주인공이 여자이고 등장인물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장르 영화광이며 '누가 죽였나' 식의 추리 영화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크림]이 장르 영화의 관습을 분류하고 해부하며 노는 것과는 달리 [떼시스]는 스너프라는 극단적인 경우를 은유삼아 매스미디어의 폭력을 비교적 진지하게 파헤치는 영화입니다. [떼시스]에는 [스크림]의 이죽거리는 농담 같은 건 없습니다.

 

뭐, 그렇다고 너무 심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떼시스]는 스릴러를 위장한 메시지 영화가 아니라 그런 주제를 담은 스릴러 영화니까요. 그리고 아주 잘 만들었어요. 영화는 이런 장르 영화의 전통이 미약한 나라에서 24살짜리가 처녀작으로 만들어낸 영화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김영진이 지적했듯이 조금 길긴 해요. 영화가 한 20분 정도 짧았더라면 더 나은 영화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떼시스]에서는 유럽의 다른 장르 영화에서 종종 느껴지는 방만함이 없습니다. 하긴 [스크림]도 이 정도로 늘어지는 영화였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떼시스]도 마찬가지에요.

 

3.

데비 레이놀즈가 할아버지에 대해 쓴 수기를 읽은 적 있어요. 데비의 할아버지는 손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다가 너무 웃어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더군요. 정말로 영화가 사람을 죽인 거죠. :-) 이 영화에서도 피게로아 교수는 스너프 영화를 보다 정말 죽습니다. 자막에서는 심장마비라고 나와있는데 혹시 천식으로 숨이 막혀 죽은 게 아닌지요?

 

물론 그런 직접적인 폭력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그리고 [떼시스]는 영화 속의 폭력을 비난하기보다는 영화 속의 폭력과 관객간의 관계를 기술하는 데에 더 집중합니다. 기초적인 질문이 나갑니다. 왜 사람들이 폭력과 그 결과물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매료되는 걸까요?

 

아메나바르는 그 과정을 나름대로 흥미진진하게 묘사해냅니다. 앙헬라가 지하철에 깔려죽은 남자의 시체에 다가가는 도입부는 그 중 가장 효과적인 장면입니다. 앙헬라가 화면을 없앤 스너프 영화의 소리에서부터 서서히 화면 속의 폭력에 접근해가는 과정 역시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폭력에의 매혹을 성적인 요소와 결합해서 그럴싸하게 묘사하는 방식도 진부하지만 꽤 근사하게 하고 있고요.

 

하는 말은 뻔해요. 그러나 아메나바르는 그 뻔한 것을 매끈하고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영화를 잘 만든다는 거죠. 의식적으로 아이 캔디식 스타일을 남발하지 않으면서도 이 정도로 개성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걸 보면 정말 재능이 있는 친구인가봐요. 특히 그가 어둠과 미로를 사용하는 방식은 정말 훌륭합니다.

 

4.

아까도 말했지만 [떼시스]는 '누가 죽였나'의 추리소설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플롯을 구성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범인을 숨겼다가 확 터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골적인 소수의 용의자들을 평면 배치하는 방법입니다. [스크림]은 첫번째에 두번째 트릭을 믹스한 것이지만 [떼시스]는 두번째에 더 집중하고 있죠.

 

두번째 방법은 서스펜스를 구성하기에 정말 편리합니다. 앙헬라가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위험하고 의심스럽습니다. 앙헬라가 어디에 붙어도 관객들은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단순히 두 사람을 세워놓는 것만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참 편리하죠.

 

물론 이 영화에서 미학적으로 적절한 범인은 단 한 명이고 아메나바르도 당연히 그 사람을 범인으로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나름대로의 반전을 주는 방법은 훌륭하지 않았나요?

 

5.

[벌집의 정령]이나 [갈가마귀 키우기]를 통해 아나 토렌트의 어린 시절 이미지에 익숙해지신 분들이라면, 서른을 훌쩍 넘긴 이 사람의 깡마른 얼굴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토렌트는 여전히 좋은 배우이고 그 사람 특유의 차분한 암울함은 거의 완벽하게 영화의 분위기와 일치합니다. 오래간만에 맞는 역을 찾은 거죠. 역시 토렌트는 죽음 근처에서 놀아야 해요.

 

노련한 토렌트 주변에 배치된 두 남자 배우는 펠레 마르티네즈와 에두아르도 노리에가라는 신인입니다. 마르티네즈 쪽이 훨씬 복잡하고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영화 팔아먹기엔 노리에가가 더 유리해보여요.

 

6.

도대체 왜 앙헬라는 경찰에 알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런 종류의 영화가 늘 받는 질문이지만, 이 영화를 볼 때처럼 끊임없이 궁금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당위성을 더 강하게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97/11/28)

 

★★★

 

기타등등

1. 아메나바르는 [오픈 유어 아이즈]로 그의 입지를 다졌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저희는 [떼시스]가 더 좋습니다. [오픈 유어 아이즈]는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경향이 있어서요.

 

2. 국내 출시된 비디오는 조금 잘렸더군요. 후반부에 시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분명히 잘렸어요. 잘린 장면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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