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꼭 엄청난 아이디어가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소재를 찾아 적절한 스타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기만 해도 성공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의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차우세스쿠가 몰락하기 2년 전인 1987년에 불법 낙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세하게 보여주겠다는 거죠. 영화는 혼전임신을 한 가비타라는 대학생과 룸메이트 오틸리아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당시에 어떤 식으로 불법 낙태가 이루어졌는지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아는 사람들을 통해 전문가를 구하고, 호텔을 잡고, 그 전문가란 인간과 실랑이를 하고, 시술을 하고, 뒤처리를 하는 과정이 영화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영화가 이 이야기를 담기 위해 선택한 스타일은 단순명쾌합니다. 일단 영화는 대부분 롱테이크 위주예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은 5분에서 7분 정도 길이의 긴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의 핸드 헬드 장면 질주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는 거의 정지되어 있고 배우들은 그 앞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의 힘으로 화면을 채워야 하죠. 영화음악도 없고 인위적인 조명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진짜처럼 보입니다.

 

뻔한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하면 이것처럼 효과적인 수단도 별로 없지요. 단지 좋은 배우들과 정확한 계산은 필수적입니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이들 모두를 가지고 있어요. 특히 오틸리아 역의 안나마리아 마린카는 영화의 절반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낙태 과정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이긴 하지만, 영화의 스펙트럼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영화는 가비타의 낙태 이야기를 메인 이슈로 다루면서 이를 통해 당시 루마니아의 지하 경제, 엄연히 남아있는 계급차별과 성차별, 사회주의 시스템 하의 억압적인 환경과 같은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삼기도 합니다. 이는 특히 오틸리아와 남자친구를 다룬 서브 플롯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영화는 보다 작은 차원의 성격물로도 재미있습니다. 아까 전 오틸리아를 연기한 마린카의 비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주인공은 가비타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모든 고통과 책임을 짊어진 건 당사자가 아닌 룸메이트 오틸리아입니다. 가비타는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희생자 역할을 즐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모두 남에게 전가하는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보고 있으면 거의 이가 갈릴 정도인데, 그만큼 사실적이기도 해요. 이런 역학 관계는 오히려 차우세스쿠의 독재보다 풀기 어렵습니다. 차우세스쿠야 2년 뒤에 처형당했잖아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황량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성공적인 것도 오래 전에 사라진 차우세스쿠 정권에 대한 비판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보편적인 황량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죠. (08/02/13)

 

★★★★

 

기타등등

1.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진짜 교훈은 "친구를 잘 사귀자"입니다. 억만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어요.

 

2.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빈틈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영화에서 오틸리아는 낙태 시술자의 가방에서 칼을 하나 훔칩니다. 그리고 그 양반은 나중에 호텔에 자기 신분증을 남겨놓고 나가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엔 그건 오틸리아가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것들이 복선이 되어 후반부에서 터져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죠.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포일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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