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1 그램 21 Grams (2003)

2010.02.01 00:41

DJUNA 조회 수:17459

 

[21 그램]은 검정색 잉크로 덕지덕지 칠한 [리턴 투 미]입니다. 두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거의 같아요. 교통사고와 심장 이식으로 맺어진 낯선 사람들이 만난다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리턴 투 미]의 낙천적인 로맨티시즘은 기대도 하지 마시길. 아까도 말했잖아요. 컴컴한 영화라고요.

 

조금 더 정보를 준다면 이 영화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심장병과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고통받는 수학교수인 폴,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크리스티나, 개심한 전과자이고 열렬한 크리스찬인 잭. 어떻게 연결되냐고요? 크리스티나의 가족을 차로 치어죽인 사람은 잭이고, 크리스티나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살아남은 쪽은 폴입니다.

 

이 다소 평범한 이야기는 조금 독특한 스토리텔링에 의해 장식됩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연대기순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조각조각 끊은 뒤 뒤섞어서 재배열하죠. 올더스 헉슬리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도대체 왜요?

 

가장 자명한 이유는 이 영화의 스토리가 그렇게까지 신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렬하고 고통스럽지만 흔한 이야기죠. 천재 감독으로 당당하게 할리우드에 입성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자신의 재주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재주를 부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렇게 뒤섞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일단 정상적인 순서로 전개된다면 관객들이 초반에 전체 이야기를 꿰뚫어버릴 수 있는 자명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퍼즐이 됩니다. 게다가 이런 뒤섞음은 영화의 암울한 주제를 더 강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해요. 아무리 주인공들이 행복해하고 희망에 차 있어도 그 장면 뒤에 곧장 이어지는 그들의 컴컴한 미래가 그 기분을 박살내니 말이에요.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미 결정된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겁니다.

 

이 컴컴한 세계관은 매우 가톨릭적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 중 가톨릭 교도는 단 한 명도 없고 유일한 크리스찬인 잭은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 신교도로 설정되어 있지만 상관없어요. 그가 무슨 종교를 택했건 그는 신이 자신에게 지운 죄의 무게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구교도의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 바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폴과 크리스티나 역시 회오리 바람에 갇힌 것처럼 영혼과 죄라는 원초적인 주제로 돌아오게 되고요. 고전적인 가톨릭 문학의 주인공들처럼 그들은 고통과 타락 속에 몸을 던지고 그 안에서 희생과 구원의 가능성을 찾습니다.

 

[21 그램]은 정말 굉장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출해낼 수 있는 세 명의 배우들을 찾아냈습니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나오미 와츠. 이들은 모두 몰락과 타락의 전문가들입니다. 펜과 델 토로가 가톨릭 서부극의 실존적 카우보이처럼 거칠고 난폭하게 자신을 폭력적 파국 속에 밀어넣는다면 와츠(love you!)는 우아한 다이버처럼 타락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집니다. 이들 세 명이 상호 교류를 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한 돈 값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절실함을 충분하게 살리기엔 이 영화는 지나치게 영리합니다. 아니, 지나치게 영리하게 굴고 있어요. 이 영화의 현란한 스타일과 작가의 지능을 과시하는 듯한 기예르모 아리아가의 각본은 이들의 고통이 충분한 폭발과 희생의 결말에 도달하는 걸 막고 있습니다. 아무리 스토리를 꼬아도 중반 이후엔 모든 게 자명해지니 그 후로는 정공법에 힘을 실어주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강렬한 스토리와 주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마땅히 도달해야 할 수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물밑에서 올라오려고 지느러미 짓을 하는 게 다 보이는 데 말이에요. (04/10/08)

 

★★★

 

기타등등

영화의 제목은 영혼의 무게를 재려고 했던 덩컨 맥두걸의 유명한 실험에서 따온 것입니다. 맥두걸이 자신의 실험에서 언제나 꼭 21그램이라는 정확한 무게만을 얻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21그램은 가장 자주 인용되는 수치이죠. 그의 실험이 믿을만 하냐고요?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감독: 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출연: Sean Penn, Naomi Watts, Benicio Del Toro, Charlotte Gainsbourg, Eddie Marsan, Melissa Leo, Clea DuV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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