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Titanic (1997)

2010.02.13 18:37

DJUNA 조회 수:8923

감독: James Cameron 출연: Kate Winslet, Gloria Stuart, Leonardo DiCaprio, Billy Zane, Kathy Bates, Frances Fisher, Bill Paxton

1. 각본

제임스 카메론은 일급 시나리오 작가는 아닙니다. 만약 그가 시나리오만 가지고 먹고 살 생각이었다면 그의 수명은 80년대로 끝났겠지요. 그의 대사는 서툴고 구성은 짜임새가 모자라며 절제를 몰라서 영화는 종종 늘어집니다.

물론 그가 나쁜 작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의 덜컹거리는 각본에는 스크립트 닥터들의 성형수술을 받아 매끈매끈해진 다른 헐리웃 영화들의 각본들에서 볼 수 없는 힘과 진지함이 있습니다. 적어도 카메론의 영화에서 각본은 그의 시각적 스타일만큼이나 중요하며 '카메론다움'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타이타닉]은 어떨까요? 그는 이 각본으로 '진짜 감독'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요? 왜 그는 엉뚱하게 20세기 초의 고풍스러운 세계로 뛰어들었던 걸까요? 분명 이 세계는 카메론에게 낯선 곳입니다. 제임스 아이보리와 루스 프라워 자발라가 완벽하게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끼어들기도 힘든 곳이죠. [타이타닉]의 서툰 대사가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도, 카메론이 그 영화에서 유달리 대사에 건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배경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루스 프라워 자발라와 같은 작가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론이 아이보리의 영토에서 버벅거리는 광경은, 관객들에게 새디스틱한 즐거움마저 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각본은 무엇보다도 카메론답습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애증섞인 비판과 강한 여성 캐릭터와 같은 그의 고유한 특성은 [타이타닉]에서도 등뼈를 이룹니다. 게다가 그의 첫 히트작 [터미네이터]와 어쩜 그렇게 내용이 똑같은지요. 둘 다 위기에 빠진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이 구해준 뒤 둘이 사랑에 빠지는데 나중에 남자는 오해를 받고 잡히지만 다시 둘이 만나 함께 고난을 뚫고 나가다가 남자는 장렬하게 죽고 여자는 살아남는다는 내용이잖아요. 아무래도 그는 이런 이야기를 '러브 스토리'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2. 로즈

[타이타닉]의 기본 줄거리는 도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나가는 집안의 딸이 하층 계급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새 사람이 된다는 영화는 [타이타닉] 말고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레이디와 트램프]는 어때요? 존 휴스턴의 [미스피츠]는?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어떻고요? 로즈와 잭이 3등 객실의 파티에 끼어드는 장면은 어딘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버스 장면을 연상시키지 않나요?

그러나 [타이타닉]은 위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타이타닉의 침몰은 인간 문명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나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에 대한 은유로 종종 사용되어 왔습니다. 카메론의 영화에서도 이런 은유는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메론은 이런 이야기보다는 여자주인공 로즈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한 여성이 근대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다루는 데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이 영화에서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죽음과 재생에 관한 통과제의적인 상징이라는 새로운 기능성을 부여받는데, 그 방식이 너무나도 원형적이라서 심지어 안도감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고로 [터미네이터]의 진짜 주인공이 사라 코너였던 것처럼, [타이타닉]의 주인공이 로즈인 건 당연하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잭의 역할은 로즈가 자신에게 내재된 힘을 깨닫고 꺼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부지요. 따라서 잭의 죽음은 어느 정도 필수적입니다. 그는 촉매니까요. 로즈의 새로운 삶은 그녀가 잭을 만날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녀의 조언자였던 잭을 바다에 수장하면서 시작되었지요.

왜 카메론이 이 모든 이야기를 회상으로 처리했는지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하지요? 만약 그가 단지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는 타이타닉의 침몰로 모든 것들을 끝냈을 겁니다. 로즈와 잭을 둘 다 죽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회상으로 이야기를 처리하면, 타이타닉은 사랑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됩니다. 로즈는 평생의 연인을 바다에 빼앗긴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로즈는 그 뒤 80여년간이나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제어하며 활기차게 살아왔습니다. 늙은 로즈의 침대 옆에 놓인 사진들을 카메라가 쭉 훑어보는 장면은 그 때문에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잭 도슨이라는 인물이 하층계급의 기사처럼 짠하고 나타나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 로즈를 인도한다는 플롯은 이 영화를 보다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게 하는 데에 장애가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원래 러브스토리이니 남자 주인공도 할 일이 있어야죠.

3. 작은 세계

타이타닉은 거대한 배일 뿐만 아니라 작은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타이타닉 사건을 다룬 다른 영화들처럼 제임스 카메론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특등실에서부터 바닥의 3등실, 지옥의 용암처럼 뜨거운 엔진실까지를 훑어가며 이 배를 당시 서구 사회의 축소판으로 재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타이타닉 호의 2등실은 어디 있는 걸까요?

[타이타닉]의 세계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이분되어 있습니다. 로즈를 제외한 모든 상류 계급의 사람들은 사악하거나 형편없으며 3등 객실의 승객들을 모두 착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공산당 선언]을 뺨칠만한 이 간단한 이분법은 영화의 깊이를 줄이는 데에 상당히 이바지하는데, 특히 칼 호클리와 러브조이의 두 악당 콤비는 그 단순함으로 사람의 얼을 빼놓을 정도입니다. 간신히 중간에 끼인 인물로 유명한 '언싱커블 몰리 브라운'이 등장하는데, 카메론은 이 캐릭터를 보다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적당히 뭉개버렸어요. 칼 호클리만 해도 조금만 더 모호하게 캐릭터를 설정했으면 훨씬 더 강렬한 인물로 보였을 겁니다.

과연 이런 이분화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의 비극성을 증가시켰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로즈와 잭의 러브 스토리를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개별 사건들은 이분된 세계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몰려드는 군중들을 제어하려고 발포하다 자살하고 마는 일등항해사 머독의 에피소드 같은 것들 말이죠.

4. 배우들

[타이타닉]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미국인으로 나와 멀쩡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데, 그 때문에 이 배우의 강한 영국식 악센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초반에 꽤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타이타닉]의 로즈는 매우 전형적인 윈슬렛식 캐릭터입니다. 코르셋으로 감싼 고전적인 몸 안에 현대적인 열정과 반항을 뒤섞는 기본적인 특성을 제외하더라도 꽤 흥미로운 디테일들의 유사점이 발견되는군요. 몇몇은 윈슬렛의 고정된 루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다른 몇몇은 애당초부터 각본에 구체적인 대사나 행동으로 지시되어져 있는 것들입니다. 카메론과 윈슬렛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카메론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쨌건 이 배우의 성장이 눈에 보입니다. [타이타닉]이 윈슬렛의 최고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엔 캐릭터가 너무 단순하니까요. 하지만 [타이타닉]에서 윈슬렛은 이제 전혀 무리 없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열정을 전혀 잃지 않았으니 앞으로 이 배우에게 더 많은 날이 남아있다고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는 당연해 보입니다. 생생한 극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로즈와는 달리 잭은 예쁘장한 기능성 인물로만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 배우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르시시즘이 이번에도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는데, 이건 디카프리오보다 카메론의 책임이 더 큽니다.

이 둘의 조화가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윈슬렛은 디카프리오보다 분명 더 성숙해보여서 오히려 디카프리오에게 조언을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카프리오에게는 밑바닥에서 자란 하층 계급 사람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듯한 굳건함과 천박함이 부족해 여전히 너무 예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잭이 정말로 하층 계급처럼 보이는 배우로 캐스팅되었다고 한다면 영화가 흐름에서 어긋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디카프리오가 캐스팅되면서 잭은 더 비현실적이 되었지만 그만큼이나 로즈나 관객들에게 안전한 판타지로 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0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남자인데 아주 리얼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프랜시스 파커, 빌리 제인, 캐시 베이츠와 같은 배우들은 단지 배경으로 남을 뿐입니다. 단지 글로리아 스튜어트의 신선한 재등장은 따로 기록해 둘 만 합니다.

5. 그리고...

[트루 라이즈] 이후 카메론의 디지탈 특수효과는 점점 하이퍼 리얼리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타이타닉]에는 수많은 디지탈 특수효과가 쓰였지만 거의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후반 작업 시간을 그렇게 많이 잡아 먹었던 디지탈 스턴트맨들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단지 도입부에서 타이타닉 전체를 훑는 장면에서는 좀 티가 나더군요. 낮 장면이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제임스 호너의 음악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자기 역할을 하고 있지만 메인 테마를 제외하면 별로 귀에 남지 않는군요. 크레디트에 나오는 셀린느 디옹의 노래는 잘 부른 것이긴 하지만 너무 평범해서 차라리 원래 음악을 한 번 더 트는 것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테크놀로지를 비판하는 영화에 엄청난 테크놀로지를 퍼부어대는 제임스 카메론의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행로에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까지 이율배반적일까요? 환상에 빠지지 않고 테크놀로지를 가장 잘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테크놀로지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 뿐일 겁니다. 그리고 카메론의 영화 중에서 맹목적인 테크놀로지 타도로 끝난 영화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게 불만인 모양이지만요. :-)

[타이타닉]은 완벽한 영화도, 깊이 있는 영화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감히 가볍게 볼 수 없는 창작자의 열정과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과대망상증적이고 순진하며 정신나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타이타닉]을 감상하는 3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니, 이 영화가 쏟아부어대는 로맨스, 스펙타클, 서스펜스는 결코 공허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98/02/21)

★★★☆

기타등등

별을 몇 개나 주면 될까요? 네 개를 주기엔 영화에 흠이 너무 많고 세 개를 줄 만큼 얌전한 영화도 아닙니다. 두 개 이하로 주기엔 기술적 완성도가 너무 높고요. 그러니 두 개 반과 세 개 반이 가장 맞을텐데, 사실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세 개 반을 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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