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Mel Gibson 출연: James Caviezel, Monica Bellucci, Maia Morgenstern, Francesco De Vito, Rosalinda Celentano, Luca Lionello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멜 깁슨은 예수의 손바닥에 못을 박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모두 손목에 못이 박혔다는 게 고정된 정설이고, 심지어 토리노의 수의에서도 못은 손목에 박혀있는데 말이죠. 모르고 그랬을까요? 아뇨, 이런 영화를 찍으면서 그걸 모를 수는 없죠. 몰라도 누군가 지적했을 겁니다.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고요.

제 생각엔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네, 멜 깁슨은 예수의 마지막날을 사실 그대로 찍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심지어 대사까지 아람어와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를요. 하지만 '사실 그대로'를 찍는다는 그 계획 속에 현대 고고학의 최신 지식을 반영한다는 작은 성의는 들어있지 않았던 거예요? 왜? 아마도 현대 고고학 따위가 그가 재현하려는 '사실'을 오염시키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영화의 숨은 의도를 생각해보면요. 깁슨이 재현하려는 '사실'은 고고학적 사실이 아닙니다. 교회와 종교의 '사실'이지요. 깁슨은 지금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머리 속에 박아두었던 이미지를 재현하려는 것뿐입니다. 물론 그것은 지난 2천년 동안 서구문화가 구체화시켰던 바로 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간 장발족 청년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당시 유태인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우리가 아는 예수처럼 장발이었을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역시 유럽 문화의 발명품이지요.)

고고학적 사실에 대한 무관심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보수적인 성격의 일부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진짜일지도 모르는 사실'이 아니라 전통인 것입니다. 의도 역시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서구 문화에서 당연시되었던 옛 믿음을 그대로 되돌리려는 것이고요.

영화는 그를 위해 아주 원초적이고 교과서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충격 요법이죠. 깁슨은 제임스 카비젤에게 아주 모범적인 예수 분장을 시켜놓고 그를 무자비하게 고문합니다. 그러면서 외치는 거예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처럼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돌아가셨어! 그러니 믿으란 말이야!"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그 피투성이 폭력에 종종 움찔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전 지금까지 본 호러 영화들 덕분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있지만 말이죠.

여기서부터 전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의 폭력성 때문은 물론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건 이 영화가 그런 시각적 고문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폐쇄적인 특정 집단의 흐트러진 믿음을 모아 결집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대부분은 영적 고양보다는 일차원적인 분노를 만들어내기 위해 짜여졌습니다. 그 때문에 전 이 영화의 3주 연속 1위 행진이 아주 위험하게 느껴지고, 십자가를 들고 극장까지 '성지 순례'를 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에 겁부터 납니다.

이 온갖 미심쩍은 구석들에도 불구하고, 전 이 영화가 제한된 의미에서 좋은 영화라고 말할 겁니다. 의도가 무엇이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진실된 열정에 가득한 힘있는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적어도 강렬함만 따진다면 이 작품은 리메이크 버전 [왕중왕]이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따위의 감상적인 할리우드 종교 영화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그 감흥은 여러분이 자신의 믿음에 진지한 크리스찬이라면 더욱 깊을 것입니다. 전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길 바랍니다.

전 다른 것들도 좋았습니다. 대사는 별로 없지만 끊임없이 등장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운 얼굴같은 것 말이죠. 로잘린다 셀렌타노가 연기한 중성의 악마나 고통스러워하는 유다의 등 뒤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던 죽은 가축의 시체와 같은 것도 흥미로운 처리였습니다. 그 중 가장 좋았던 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구레네 시몬의 묘사였습니다. 전 특별한 믿음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름도 모르는 한 죄인의 짐을 같이 짊어져주고 그가 겪는 부당한 고통에 분노했던 그 우직하고 평범한 남자가 좋았습니다. 오히려 뒤에 줄줄 이어지는 로마서의 후일담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더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전 여전히 이 영화를 미심쩍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아무리 강렬해도 어쩔 수 없이 얄팍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제공하는 미적 경험의 대부분은 살갗의 신경으로 몰려있고 내적 갈등의 깊이는 빈약합니다. 이 영화는 주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믿음의 근거를 교회에 의탁해버린 예술가의 작품입니다. 그 때문에 저에겐, 공산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던 한 이탈리아 동성애자가 그린 혁명가 예수의 간결한 초상이나, 온갖 금기시된 상상 때문에 신성모독자로 몰렸던 한 그리스 남자가 그린, 위험한 유혹으로 일그러진 예수의 초상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진실된 종교적 경험처럼 느껴집니다. (04/03/19)

★★★☆

기타등등

1. 예수의 손바닥에 못을 박는 손은 멜 깁슨의 것이라고 합니다.

2. 영어를 포기하고 대사를 모두 아람어와 라틴어로 일관한 영화의 한국 제목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