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 헬 From Hell (2001)

2010.02.12 20:46

DJUNA 조회 수:5699

감독: Albert Hughes & Allen Hughes 출연: Johnny Depp, Heather Graham, Ian Holm, Ian Richardson, Robbie Coltrane, Lesley Sharp, Susan Lynch, Terence Harvey, Katrin Cartlidge, Estelle Skornik, Paul Rhys, Jason Flemyng

잭 더 리퍼는 최초의 연쇄살인마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최초로 미디어 스타가 된 연쇄 살인마였습니다. 1888년 여름 런던 이스트 엔드에 갑자기 나타나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다섯 (또는 여섯? 여덟?) 명의 매춘부들을 살해한 그는 수많은 작가들과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픽션의 세계에서 그는 셜록 홈즈와 싸우고, 허버트 조지 웰즈의 타임 머신을 타고 미래로 건너갔으며, 심지어 그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네스 호의 괴물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수준을 조금 높게 잡으면 베데킨트의 희곡과 알반 베르크 오페라의 주인공 룰루를 살해한 이도 바로 그였지요. 우리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연쇄 살인마 괴물들이 부글거리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잭 더 리퍼라는 별명에는 아직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테드 번디와 제프리 다머가 사람을 더 많이 죽였을지는 몰라도 잭 더 리퍼처럼 유명해질 수는 없을 거예요.

오늘 다룰 영화 [프롬 헬]의 원작은 앨런 모일과 에디 캠벨이 쓴 동명의 그래픽 노블입니다. 원작이 된 만화책과 영화는 잭 더 리퍼에 대한 수많은 가설들 중 (결말 알고 싶지 않으신 분은 다음 문단으로 건너 뛰세요!) 프리 메이슨과 왕가 음모설을 골라 결합해 그들만의 살인마를 만들어냈습니다. 진짜일까요? 누가 알겠어요? 어차피 수많은 잭 더 리퍼 관련 소설들과 영화들이 자기만의 후보자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죠.

원작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영화 [프롬 헬]은 그렇게까지 실제 살인 사건에 충실하지는 않습니다. 프레드릭 애벌레인, 피터 가들리, 메리 켈리와 같은 살인사건의 등장인물들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등장하며 살인의 세부사항은 거의 일치하지만 자유로운 각색이 개입된 부분이 더 많습니다. 일단 잭 더 리퍼의 활약 시기가 훨씬 짧게 압축되어 있어요. 등장 인물들도 적당히 여유롭게 각색된 편이고요. 특히 건실한 직업 경관이었던 실제 프레드릭 애벌라인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예지 능력이 있는 아편 중독자 셜로키언 명탐정으로 나오는 영화 속의 조니 뎁을 보고 기겁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가 메리 켈리와 그처럼 뜨거운 사이였을 가능성도 전무해요.

영화는 실제 살인 사건의 재현과 장르 관습 사이를 방황합니다. 종종 여러 장르가 한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이기도 하죠. 매춘부들을 협박하는 니콜라스 갱들은 마치 찰스 디킨즈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 하고 살인은 전형적인 20세기 슬래셔 무비 풍이며 사건을 수사하는 애벌라인 경위는 구식 명탐정이니까요.

이 영화가 그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도 실제 런던이라기보다는 압상트와 로다놈을 믹스해 마신 뒤 꾼 악몽 속에 나오는 공간 같습니다. 영화의 스타일은 원작인 만화책에서도 빌려왔겠지만 기본적으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에서 더 많은 것들을 빌려왔을 가능성이 더 커요. 하여간 영화는 컴컴한 힘으로 가득찬 상당히 인상적인 비주얼들을 제공해줍니다. 진짜 슬래셔 영화들처럼 난도질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번뜩이는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첫번째 살인 같은 장면들은 다리오 아르젠트도 흐뭇해할만큼 잘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왜 앨버트와 앨런 휴즈 형제는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요? 뭐, 사회파 흑인 감독들이라고 해서 폭력적인 흑인 빈민가만 다루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프롬 헬]에서도 이들이 종종 다루어왔던 사회 비판의 흔적이 보이기도 해요. [프롬 헬]을 액션 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에 억눌린 사람들이 사는 빈민가를 무대로 피투성이 폭력이 벌어진다는 설정은 형제의 전작과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까요. 이들이 이 영화가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그들이 보는 현대 미국의 은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프롬 헬]의 진짜 가치는 이런 은유나 교훈보다는 스타일에 있습니다. 아마 휴즈 형제는 그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흑인 빈민가를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영화적 상상력을 휘두르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는 동안 잭 더 리퍼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세계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훨씬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냈던 것이 아닐까요? (02/02/26)

★★★

기타등등

에스텔 스코르닉은 요샌 그냥 영국인 배우처럼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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