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Vertigo (1958)

2010.02.06 20:12

DJUNA 조회 수:6585

감독: Alfred Hitchcock 출연: James Stewart, Kim Novak, Barbara Bel Geddes, Tom Helmore 다른 제목: 버티고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있으니까 유의하시고.)

듀나 지금 와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거의 쑥쓰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만큼이나 모두가 아는 영화이고 그만큼이나 많이 이야기된 영화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롭게 특별히 첨가할 것도 없잖아요.

파프리카 언제 우리가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이야기 했었나요?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독창적인 생각만 골라 지껄였다고 착각하겠어요.

듀나 음...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죠. 일단 줄거리부터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형식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영화는 한밤중의 추격전으로 시작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형사인 존 퍼거슨 (별명 스카티)는 용의자를 추적하다가 그만 삐끗해서 지붕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는데, 그와 함께 용의자를 쫓던 제복 경관이 그를 구하려다 그만 떨어져 죽습니다. 그 뒤로 심한 고소공포증에 시달리게 된 스카티는 경찰일을 그만두고 맙니다.

플라토닉한 사이인 여자 친구 미지와 노닥거리며 남는 시간을 보내던 스카티는 옛 친구인 개빈 엘스터의 연락을 받습니다. 엘스터는 최근 들어 정신이 조금 이상해 진 듯 한 아내인 마들레인을 미행해달라고 요구하죠. 그녀를 미행하던 스카티는 마들레인이 그녀의 증조 할머니 뻘되는 카를로타 발데스라는 여자에게 홀려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금문교 근처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던 마들레인을 구출한 뒤로, 스카티는 마들레인의 삶에 뛰어듭니다. 마들레인을 사랑하게 된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카를로타의 악몽에서 구출하려 하지만 마들레인은 수녀원의 종탑에 올라가 몸을 던지고 맙니다. 고소공포증으로 꼼짝 못하는 스카티를 밑에 놔둔 채로 말이에요.

충격으로 한동안 요양원에 들어가 있던 스카티는 퇴원한 뒤로 몽유병자처럼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제는 죽고 없는 마들레인의 흔적을 찾아헤맵니다. 그러다 그는 하는 짓은 딴판이지만 마들레인과 놀랄만큼 닮은 주디 바튼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지요. 스카티는 주디에게 접근하고 머뭇거리던 주디는 결국 그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디는 바로 스카티가 알고 있던 마들레인이었습니다. 스카티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은 아내를 죽이려는 엘스터의 음모였지요. 스카티는 살인을 자살로 조작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는 주디 역시 스카티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뒤로 스카티는 주디를 마들레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합니다. 마들레인이 입었던 옷을 사주고, 헤어 스타일을 마들레인처럼 바꾸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 결국 진상을 알아차린 스카티는 겁에 질린 주디를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종탑으로 끌고 갑니다. 스카티에게 모든 걸 고백한 주디는 종탑으로 올라오는 수녀의 모습에 놀라 떨어져 죽고 말죠. 그리고 그 순간 스카티는 고소공포증에서 해방됩니다.

파프리카 전체적으로 [현기증]은 일반적인 히치콕 영화들과 모양이 많이 다릅니다. 히치콕 영화는 구성이 좀 산만할 수는 있어도 늘 빠르고 사건 위주지요. 내용이 심각하고 어두울 수는 있어도 대부분 해피엔딩이고요. 하지만 [현기증]은 느리고 분위기 위주이며 결말도 어둡습니다.

듀나 꽤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한 감독의 일관성을 그렇게까지 간단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히치콕처럼 성격 분명한 '작가'라고 해도 말이에요. 히치콕은 수많은 각색물을 만들었고 그 작품들엔 원작자의 개성 역시 상당히 담겨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현기증]의 원작은 프랑스의 콤비 추리 작가인 피에르 브왈로와 토마 나르스자크가 쓴 [죽은 자들 사이에서 D'entre les morts]라는 소설입니다. 제가 읽은 이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토리가 비슷비슷하죠.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이고, 어떤 여자 또는 여자들과 관련된 초자연적인 사건에 말려듭니다. 소설이 끝날 무렵엔 신비스럽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음모였다는 게 밝혀지지만 주인공은 파멸하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가 히치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전형적인 브왈로-나르스자크의 스타일이니까요.

파프리카 [히치콕과 대화]를 보면 브왈로와 나르스자크는 히치콕에 의해 영화화될 것을 예상하고 이 소설을 썼다더군요.

듀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자기네들의 개성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 소설은 그들의 작품답고 히치콕 역시 별다른 개작 없이 스토리를 받아들였으니까요. 맘에 안들면 이야기를 몽땅 개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히치콕이지만, 원작에서는 2차 세계대전 중반과 이후의 프랑스였던 배경을 50년대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것,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을 중반에 노출시킨 것, 결말을 바꾼 것 이외엔 특별히 손댄 구석이 없습니다.

파프리카 그러나 그 작은 개작은 영화를 굉장히 히치콕적으로 만들죠. 중간에 주디가 사실은 마들레인이었다는 진상을 노출시키면서 히치콕은 그가 늘 영화 속에서 해왔던 것을 하고 있어요. '미스터리' 대신 '서스펜스'를 선택한 것이지요. 주디의 정체를 알게 된 관객들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방황하는 대신 주디와 스카티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하며 지켜보게 되거든요.

듀나 여기엔 서스펜스를 만드는 것보다는 극적으로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 전반부에서 관객들이 감정 이입을 한 대상은 스카티였습니다. 하지만 주디의 정체가 밝혀지는 바로 그 순간 관객들은 감정 이입의 대상을 바꾸게 됩니다. 여전히 관객들은 스카티를 어느 정도 따라가지만 후반부에 일어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주디의 시점에서 고정되어 있습니다.

아주 효과적인 개작입니다. 그냥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 남자였던 전반부의 스카티와는 달리 후반부의 스카티는 정말 좀 정신이 나갔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따라갈 수 없을 정도죠. 하지만 관객들은 주디의 두려움과 애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스카티를 계속 쫓아가는 것보다 정서적 힘이 클 수밖에 없어요.

파프리카 그래서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거칠죠? 주디의 회상은 갑작스럽고 마지막 결말 역시 조금 작위적으로 선택된 듯한 느낌입니다.

듀나 네, 그리고 그건 제가 전에 말한 개성 충돌의 증거입니다. 히치콕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다 고쳤다면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맘에 들었던 브왈로-나르스자크의 이야기를 그대로 하면서 변경된 부분마다 자신의 개성을 삽입했지요. 이것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 건 당연해요. 브왈로와 나르스자크가 소설을 통해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히치콕이 브왈로와 나르스자크의 소설을 통해 하려고 했던 이야기와 조금 다르니까요.

바뀐 결말을 살펴보죠. 원작 소설의 주인공 플라비에르는 그가 폴린의 목걸이를 발견한 뒤에도, 르네가 사실을 고백한 뒤에도, 르네가 르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가 르네를 죽인 건 계속 사실을 떠들어대는 그녀의 존재가 마들린느에 대한 그의 환상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죠. 플라비에르에게 르네는 마들린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에요.

하지만 스카티에게 주디와 마들레인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플라비에르는 자기가 마들린느라고 생각하는 여자를 쫓아다녔지만, 스카티는 그가 마들레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자를 데려와 마들레인으로 만들려 하지요. 그리고 히치콕에게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파프리카 이런 변형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스카티와 주디의 관계는 히치콕과 그가 만들어낸 금발 미녀들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히치콕이 배우들을 그가 만들어낸 금발 미녀의 틀 안에 밀어넣는 것처럼 스카티는 주디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마들레인으로 만들어내려 합니다. 두 과정 모두 상당히 새디스틱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듀나 히치콕도 만들면서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 사람은 꽤 솔직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 영화가 흥미진진한 것이지만.

[현기증]은 히치콕 영감의 변태 성향이 정말 노골적으로 표출된 영화입니다. 스카티는 전직 형사답지 않게 마들레인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에 강한 페티시즘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마들레인에 대한 그의 사랑은 네크로필리아와 뿌리를 같이 하고 있고요. 이런 것들이 그의 극단적인 소유욕과 강압적인 통제 욕망과 결합했으니 결과는 자명하다고 해야겠습니다. 제가 주디였다면 두 번 생각 않고 당장 달아났을 거예요. 이런 남자와 같이 살면 미래는 뻔하잖아요? 하긴 주디의 입장도 아주 정상은 아니군요. 죽은 여자인 척 하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경쟁자인 자기 자신으로 변장해야 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꽈배기 커플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배배 꼬였어요.

파프리카 전 늘 스카티가 게이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들레인에 대한 그의 사랑에는 이상할 정도로 육체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스카티가 물에 빠진 마들레인을 구출한 뒤를 보세요. 자기 아파트에 의식을 잃은 마들레인을 데려온 그는 마들레인의 속옷까지 모두 벗겨서 말립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이상, 보통 이성애자 남자들은 이런 일을 그렇게까지 당연하게 하질 못하죠. 적당히 신사처럼 굴거나 아니면 정반대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영화 내내 그는 마들레인의 육체보다는 그녀의 옷이나 헤어스타일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과연 평범한 이성애자 남자가 몇 달 전에 죽은 여자의 옷차림을 제대로 기억하기나 하겠어요?

하나 더. 스카티와 여자 친구 미지의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윌 & 그레이스]를 연상시키지 않나요? 영화 전체를 통해 미지는 전형적인 패그해그처럼 행동하잖아요. 특히 미지의 대사 몇몇은 그대로 그레이스의 대사로 써먹어도 될 정도죠.

듀나 스카티처럼 히치콕도 여자 헤어스타일이나 의상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카티처럼 굴기 위해 꼭 게이일 필요는 없어요. 히치콕에게 게이 성향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전 미지가 또다른 히치콕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히치콕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경을 쓴 평범한 외모의 여자들이 조역으로 출연하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어린아이여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안경 쓴 아이들의 모델이 히치콕의 딸 패트리샤 히치콕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실제로 패트리샤 히치콕은 어른이 되어서 아빠의 영화에 그런 안경 쓴 아가씨들로 출연하곤 했어요.

파프리카 히치콕의 부인인 알마 레빌도 안경을 쓰고 있죠?

듀나 네,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히치콕은 세트장에서 늘 화려한 금발 스타들을 가축처럼 부려먹으며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생활을 같이 보내고 예술적인 영감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평범한 외모에 안경을 낀 영리한 여자들이었어요. 미지와 마들레인은 히치콕의 그런 삶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럽판 결말을 보면, 주디가 죽은 뒤 스카티는 다시 미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누가 미지의 모델이 알마였다고 주장해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파프리카 전 미지 역의 바바라 벨 게데스가 좋아요. 이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배우입니다. 연기도 좋았지만 캐릭터가 공감하기 가장 쉬운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스카티나 주디는 다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니까.

듀나 킴 노박에 대해서는 그만큼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죠?

파프리카 네, 전에 이야기했을텐데요. 전 계획대로 베라 마일즈가 그 역을 맡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베라 마일즈는 킴 노박보다 훨씬 노련한 배우이고 히치콕 금발 미녀의 이미지와도 더 잘 맞는 걸요. 킴 노박은 좀 거칠고 굵은 이미지여서 마들레인 역엔 잘 안 어울려요. 그 사람은 소위 50년대 육체파 배우잖아요.

듀나 저도 처음엔 킴 노박이 어색했답니다. 아마 이 영화를 [이창] 다음에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창]의 여자 주연인 그레이스 켈리는 완벽한 히치콕 금발 미녀잖아요?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킴 노박의 기용은 그처럼 잘 맞을 수 없습니다. 영화 속의 마들레인은 진짜 히치콕 금발 미녀여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은 히치콕 금발 미녀로 변장한 보통 여자지요. 겉보기엔 그렇게 히치콕 금발 미녀답지 않은 노박을 히치콕의 영화에 맞추어 변장시키는 과정은 [현기증]이라는 영화의 내용과도 흐름을 같이 합니다. 그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 역시 진짜고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킴 노박은 놀랄 정도로 연기를 잘합니다. 노박이라는 배우한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연기일 거예요. 그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히치콕이 과연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파프리카 제임스 스튜어트는요? 이 영화가 그 사람의 마지막 히치콕 영화죠?

듀나 히치콕은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게 스튜어트가 너무 늙어서였다고 우겼다죠? 심술궂은 영감 같으니. 하지만 스튜어트는 잘 했어요. 그는 모범적인 미국 남성 이미지를 가진 배우치고는 기가 막힐 정도로 이런 꽈배기 캐릭터를 잘 연기해내니까요. 그런 모범적인 이미지가 대조를 위해 교활하게 활용된 점도 있겠지만.

파프리카 할 이야기는 다 한 건가요? 아직 뭔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기증]을 이야기하면서 유명한 트래킹 앤 줌 테크닉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어요?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솔 바스의 타이틀 시퀀스는요? 마들레인을 위해 불멸의 초록 가운과 회색 수트를 만들었던 이디스 헤드는요? 이 모든 것들을 위해 정신 나갈 정도로 로맨틱한 음악을 써주었던 버나드 허먼은?

듀나 아,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 우리가 또 되풀이 할 필요는 없지요. 지금도 꽤 길어졌는 걸요. 대충 이쯤해서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01/08/28)

★★★★

기타등등

IMDb를 확인해보니 [죽은 자들 사이에서]를 각색한 영화가 하나 더 있더군요. [La Présence des ombres]라는 캐나다 영화입니다.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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