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Les Destinées sentimentales (2000)

2010.02.10 19:14

DJUNA 조회 수:2634

감독: Olivier Assayas  출연: Emmanuelle Béart, Charles Berling, Isabelle Huppert, Olivier Perrier, Dominique Reymond, André Marcon, Alexandra London, Julie Depardieu 다른 제목: 감상적인 운명, Les destinées, Sentimental Destinies

[Les Destinées sentimentales]은 긴 영화입니다.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이나 되지요. 영화가 1900년부터 30년대 초까지의 긴 기간을 커버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3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자크 샤르돈느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장 바르네리라는 남자의 후반 30년을 다루고 있습니다. 도자기 사업가의 아들인 그는 영화가 시작할 무렵엔 작은 마을의 목사입니다. 스캔들에 휘말린 아내와 이혼하고 성직을 떠난 그는 폴린느라는 젊은 여자와 재혼한 뒤 스위스에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자 그는 가족과 사업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돼요. 노조와의 충돌, 대공황, 개인적인 야심과 투쟁하는 동안 이 전직 이상주의자 목사는 서서히 차가운 사업가로 변해갑니다.

긴 영화답게 하는 이야기도 많은 영화지만, [Les Destinées sentimentales]의 기본 주제는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순수함의 붕괴지요. 영화가 시작할 무렵엔 장 바르네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비교적) 순수하고 결백합니다. 그는 분명한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만한 깨끗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도 스캔들에 휘말린 아내를 비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죠. 장과 폴린느가 스위스에서 같이 한 삶도 정갈하고 순수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장이 기본적으로 은둔자였으며 20세기의 역동적인 세계에서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장이 가족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이 보존된 순수함은 더럽혀지기 시작합니다. 장과 폴린느의 관계는 어색해지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동안 그의 도덕적 결백함도 무너집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한 인간의 퇴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현실 세계와 충돌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과정이죠. 한마디로 그는 나이를 먹은 것입니다. 서글픈 과정이긴 하지만 당연한 성숙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3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에서는 장과 폴린느의 만남을 다루고, 2부에서는 폴린느와 장의 결혼 생활을 다루며, 3부에서는 전쟁 이후 그들이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후반부로 흐를수록 커버하는 시간대가 넓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가 흐르는 동안 가속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느긋하게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는 비교적 에피소드 나열 위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린 1, 2부를 통해 그 캐릭터들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추가 설명은 필요하지 않죠.

영화는 신중하고 담담합니다. 어떨 때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많은 관객들이 그런 담담함 때문에 종종 중요한 극적 포인트를 놓쳤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보고 말하라고 한다면 그런 진행 방식은 이야기와 소재에 맞다고 대답하겠습니다. 20세기 초를 사는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부르주와 가정에 대한 이야기에 쓸데없이 멜로드라마틱한 터치를 더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화는 늘 얌전하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3부라면 10여년 정도를 커버했을 만한 시간이 할애되는 1부의 무도회 장면에는 거의 옛 비스콘티의 영화들이 제공해주었던 것과 같은 감각적인 즐거움이 녹아 있습니다. 물론 엠마뉘엘 베아르의 호사스러운 아름다움은 늘 플러스고요.

배우들은 특별히 기교를 내세워 연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다들 자기네들의 기존 이미지에 조용한 캐릭터를 맞추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 해요. 하지만 바로 그런 조용함 때문에 오히려 감정이 사는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요.

[Les Destinées sentimentales]의 러닝타임은 길게 느껴질 수도 있고 짧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조용하지만 그렇게까지 호흡이 느린 편은 아닙니다. 실제로 후반부에 이르르면 영화가 많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요약만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아마 원작 소설이 더 긴 러닝타임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영화는 여전히 풍요로워서 영화의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는 마치 묵직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02/12/16)

★★★☆

기타등등

제6회 부산 국제 영화제 상영작입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