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오루크 Princess O'Rourke (1943)

2010.02.19 10:16

DJUNA 조회 수:2442

감독: Norman Krasna 출연: Olivia de Havilland, Robert Cummings, Charles Coburn, Jack Carson, Jane Wyman, Harry Davenport, Gladys Cooper, Minor Watson

망명한 공주인 마리아는 따분한 뉴욕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탑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날씨 때문에 뉴욕으로 돌아오고 수면제를 과용한 마리아는 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깨어나질 못하죠. 비행사인 에디는 정신을 잃은 마리아를 비행사 숙소로 데려오고 둘 사이에는 로맨스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프린세스 오루크]가 현대 관객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설정이죠. 수면제를 먹고 밖에서 잠든 유럽의 공주가 나중에 미국인 평민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십여 년 뒤에 나온 영화 [로마의 휴일]과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잖아요. 달턴 트럼보가 [로마의 휴일]의 대본을 쓰면서 이 작품을 염두에 두었을까요? 모를 일이죠.

어느 쪽이 먼저이건, 신분을 숨긴 공주와 평민과의 사랑은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도입부에서 이야기의 매력을 흥미진진하게 끌어냅니다. 특히 수면제 장면에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보여주는 귀여운 코미디 연기는 이 배우한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공주가 전쟁 준비에 한창인 미국의 소시민들 사이에 섞이는 장면 역시 서글픈 드라마의 느낌과 로맨스가 적당히 결합되어 괜찮은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유감스럽게도 [프린세스 오루크]는 귀여운 도입부의 가능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로맨스는 곧 막혀버리고 마리아가 에디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는 중반 이후부터는 종종 거의 전쟁 홍보 영화처럼 보이거든요. 1943년도 영화이니 그런 분위기는 당연할 수도 있지만 전쟁 분위기를 내는 드라마를 만드는 거랑 강압적으로 메시지를 머리에 박아 넣는 건 사정이 다르지요. 특히 그 메시지의 일부가 미심쩍을 때는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요란한 연설을 해대며 백악관을 뛰쳐나가는 에디의 모습은 대단한 희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속좁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람의 임무나 직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자기가 가진 걸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그 때문에 백악관에서 도둑 결혼한 마리아가 에디와 몰래 달아나는 '해피 엔딩'은 저에겐 전혀 만족스럽지 않답니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에겐 이 작품은 꽤 괜찮은 호응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하긴 자기네 집 개가 후반부에 중요한 조연을 맡았고 얼굴은 드러내지 않지만 자기 캐릭터가 특별 출연까지 하는 영화이니 맘에 안들었으면 이상했겠지요. 이 영화의 각본을 쓴 감독 노먼 크라스나가 노엘 카워드와 릴리언 헬먼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것도 그런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금 와서 보면 잘한 선택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03/06/18)

★★

기타등등

1. 이 영화에서 이름을 딴 프린세스 오루크라는 미국 폭격기가 있었습니다. 45년 4월에 격추되었다고 하더군요. 인터넷 서핑하다 이 사진을 찾았습니다.

2. 마리아가 생각없이 삼킨 수면제의 양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 수면제가 어떤 종류인지는 몰라도 그 정도 양이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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