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순간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1956)

2010.01.27 11:42

DJUNA 조회 수:2509

감독: Julien Duvivier 출연: Jean Gabin, Danièle Delorme, Lucienne Bogaert, Gérard Blain, Germaine Kerjean, Gabrielle Fontan 다른 제목: Deadlier Than the Male

주인공 앙드레 샤틀랭은 비교적 행복한 사람입니다. 파리에 잘나가는 레스토랑을 열고 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을 받고 있으며 양자라고 할 수 있는 아들 나이의 의대생 제라르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죠. 앙드레의 이런 행복은 죽은 전처의 딸이라는 카트린느가 찾아오면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천사처럼 순진무구하고 예쁘장한 카트린느는 앙드레와 제라르 모두를 유혹하고 동시에 그들을 이간질합니다. 이들의 위장된 삼각관계는 서서히 궁지에 몰린 카트린느가 위험한 선택을 하면서 치명적인 결말에 도달하게 되지요.

[안개 낀 부두]와 같은 영화들로 뒤비비에의 이름을 접한 관객들에게 [살의의 순간]은 섬뜩한 반전입니다. 미국 필름 느와르 영화와 프랑스 이상심리물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이 컴컴한 영화는 뒤비비에가 이전에 만든 몽환적이고 우울한 로맨스의 대척점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전쟁을 겪고 나이를 먹다보니 우울한 로맨티스트가 심술궂은 리얼리스트 영감탱이가 된 것일까요? 전 모르죠.

[살의의 순간]의 드라마에 구심점을 제공해주는 인물은 장 가뱅이 연기한 앙드레지만,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다니엘 델로르므가 연기한 카트린느입니다. 카트린느는 한 마디로 여성판 이아고입니다. 타고난 협잡꾼이며 사기꾼이죠. 아직 경험이 부족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공범자를 잘못 만나 종종 애를 먹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카트린느의 어두운 성장 배경을 가끔 드러내며 이 캐릭터의 성격을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이 양심이 결여된 타고난 범죄자의 음흉한 계략을 조금씩 펼쳐가며 즐기는 쪽을 택합니다. 영화는 차갑고 냉정하고 야비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영화의 노골적인 여성혐오적인 태도입니다. 단순히 악역이 여성이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이 영화에는 긍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카트린느도 악당이지만 앙드레를 깔아뭉게는 어머니나 그의 형편없는 전처 가브리엘도 만만치 않죠. 결정적으로 이들의 성격과 위치는 극단적으로 유형화되어 있습니다. 모두 중산층 프랑스 남성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악녀들이죠. 순진무구하고 멍한 남자들의 등을 쳐먹으려 하는 육식조류들인 겁니다. 그 때문에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여자들 때문이야! 너네들도 조심해!"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이런 느낌이 너무 강해서 모든 게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결말에 도달하면 오히려 앙드레 쪽이 더 두렵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전 앙드레보다는 카트린느를 동정하는 게 더 쉽습니다.

장 가뱅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빛을 내는 배우는 카트린느를 연기한 다니엘 델로르므입니다. 델로르므는 카트린느를 일차원적이고 무시무시한 캐리커처로 연기하는 대신 그 나이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지닌 평범한 욕망과 갈망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선천적으로 양심이 결여된 무도덕적인 동물로 그려냅니다. 그 결과, 저지르는 범죄가 아무리 극단적으로 흘러도 카트린느는 끝까지 흥미진진하고 강렬한 감정을 담은 근사한 캐릭터로 남습니다. (04/12/28)

★★★☆

기타등등

이미 [웨인즈 월드 2]를 본 뒤라, 카트린느가 제라르를 살인범으로 만들려는 장면은 저에겐 잘 먹히지 않더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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