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Drácula (1931)

2010.02.06 20:52

DJUNA 조회 수:5677

 

벨라 루고시/토드 브라우닝 버전 [드라큘라]는 유니버설 사에서 만든 최초의 유성 호러 영화였습니다. 당시는 과도기였고 사람들은 유성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아직 잘 몰랐답니다. 예술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상품으로도 그렇고요.

 

예술은 예술가들에게 맡겨 놓으면 됩니다. 영화사에서 걱정한 것은 상업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무성 영화는 기본적으로 팔기 쉬운 매체였습니다. 자막만 번역해서 바꾸어주면 어디에서건 먹혔으니까요. 하지만 영어 영화의 시장은 영어권 나라밖에 없었지요. 다시 말해 회사가 그 동안 다져놓았던 해외 시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자막이나 더빙이 있잖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화사 사람들이 내놓은 대안은 다른 것이었죠. 외국어로 된 버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초기 유성 영화들은 정말로 이렇게 제작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영화들이 해외버전과 함께 남아 있지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협박], 클라렌스 브라운의 [안나 크리스티]... 네, [드라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미 시장을 커버하기 위한 스페인어 버전이 따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두 영화는 거의 동시에 제작 되었습니다. 영어 영화 팀이 낮에 영화를 찍고 나오면, 밤에 스페인어 팀이 같은 세트에서 같은 장면들을 찍는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나온 스페인어 버전은 아주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90년대에 이 영화를 다시 접했던 영화팬들에게 이 버전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스페인어 버전은 여러 면에서 원작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원작보다 좀 호흡이 느리고 길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기술적 완성도는 더 높았으며 더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다가? 글쎄요... 이건 앞 학생의 시험지를 몰래 훔쳐본 학생의 성적이 앞 학생보다 더 잘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스페인어 팀은 영어 팀이 영화를 찍는 동안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 과정을 열심히 관찰하다 정작 자기네들이 영화를 찍을 때가 되면 '우린 더 잘할 수 있어!'하면서 영화에 달려들었답니다. 토드 브라우닝 팀이 가진 창의성을 모두 끌어다쓰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전 팀의 작업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던 것이죠.

 

구체적으로 이 두 버전은 어떻게 다를까요? 일단 스페인어 버전이 더 깁니다. 그리고 스토리와 편집이 더 좋지요. 영어 버전은 종종 툭툭 끊기며,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어 버전은 이야기가 훨씬 매끈하게 흘러가요. 필요없는 설명 같은 것들도 없어져서 더 간결한 느낌도 들고요.

 

카메라 워크도 영어 버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종종 더 도전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더 극적이며 영화 같습니다. 영어 버전보다 자극적인 부분들이 더 많고요. 영어 버전에서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던 드라큘라의 세 신부들은 정말로 렌필드를 공격합니다. 여자 주인공들이 입은 옷들도 훨씬 '섹시'하고 노출이 심하게 디자인되었지요.

 

원래 각본에서 의도했지만 영어 버전에서 실현하지 못한 걸 제대로 살린 부분도 있습니다. 영어 버전의 후반부에서 벨라 루고시의 드라큘라는 미나에게 최면을 걸어 밖으로 끌어내지만, 스페인어 버전의 드라큘라는 기절한 에바를 안고 나가죠. 작고 가냘펐던 벨라 루고시는 여자를 들고 긴 계단을 오르는 역을 할 수는 없었지만 꽤 건장한 체격이었던 카를로스 비야리야스는 할 수 있었던 겁니다. :-)

 

그러나 이 영화가 영어 버전보다 전적으로 우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평면적인 무대극 각색에 불과한 각본의 문제점은 스페인어 버전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나은 테크닉을 과시하고 있긴 하지만 영어 버전이 더 좋은 장면도 많습니다. 미쳐버린 렌필드가 유령선에서 발견되는 부분이 대표적이죠.

 

스페인어 버전 영화의 가장 큰 결점은 주연 배우인 카를로스 비야리야스입니다. 아무리 낡은 느낌을 준다고 해도 벨라 루고시는 정말 훌륭한 드라큘라였습니다.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무시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스 비야리야스는 무서운 괴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카지노 주변을 어정거리는 나이 든 라틴 지골로 같지요. 그가 종종 무섭게 보이려고 짓는 표정이나 제스쳐도 웃기기만 해요. 렌필드 역에도 파블로 알바레즈 루비오보다는 드와이트 프라이 쪽이 더 나은 듯 합니다. (01/01/17)

 

★★★

 

기타등등

[백조의 호수]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이외에 음악이 하나 더 사용되었더군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의 도입부가 드라큘라의 주제곡처럼 쓰입니다. 

 

감독: George Melford, Enrique Tovar Ávalos 출연: Carlos Villarías, Lupita Tovar, Barry Norton, Pablo Álvarez Rubio, Eduardo Arozamena, Carmen Guerrero, José Soriano Viosca, Manuel Arbó, Amelia Senist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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