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타 Roberta (1935)

2010.02.01 06:49

DJUNA 조회 수:3843


영화 제목에 나오는 '로버타'는 진저 로저스의 캐릭터 이름이 아닙니다. 헬렌 웨스틀리가 연기하는 미국인 할머니의 가명이지요. 몇 십 년 동안 파리에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해 온 이 할머니에게 어느 날 존 켄트라는 조카가 찾아옵니다. 이 사람이 프레드 아스테어냐고요? 아뇨, 그건 랜돌프 스코트의 역입니다. 랜돌프는 오자마자 할머니 밑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스테파니에게 반하는데... 이 역시 진저 로저스의 역할은 아닙니다. 크레딧 맨 위에 이름이 뜨는 아이린 던의 역할이지요. 그럼 진저와 프레드는 무슨 역을 맡았을까요? 프레드 아스테어는 밴드 리더인 존의 친구인 허크, 진저 로저스는 폴란드 귀족으로 위장하고 파리에서 가수 일자리를 찾는 프레드의 옛날 고향 친구 리즈입니다. 로버타가 죽고 존이 가게를 물려 받고 존과 스테파니가 서로에 대한 감정 때문에 고민하는 동안 진저와 프레드는 언제나처럼 서로를 희롱하고 음악이 나오기만 하면 스텝을 밟으며 스테이지를 누빕니다.


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진저와 프레드가 아닙니다. 아일린 던과 랜돌프 스코트죠. 이미 그들이 [게이 디보세]로 스타성을 보장받았는데도 왜 그 다음 영화에서 다시 서브여주와 서브남주의 역할로 떨어졌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냥 원래부터 원작 연극이 있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RKO에서 그들을 여전히 믿지 못했거나. 하긴 당시 관객들에게도 아주 이상한 선택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이린 던은 믿음직한 스타이고 훌륭한 배우이며 뮤지컬 배우로서 경험도 풍부하니까요.


하지만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보면, [로버타]는 그냥 어색합니다. 진저와 프레드가 나오면서 진저와 프레드가 주연이 아닌 영화는 다 그렇죠. 아이린 던이 진저보다 더 많이 나오고 뮤지컬 시퀀스도 더 많다는 걸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건 단순한 편견 때문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린 던의 뮤지컬 시퀀스들은 대부분 재미가 없어요. 던의 다소 고풍스러운 스타일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맞지 않고 고정된 클로즈업으로 일관하는 노래 장면들은 역동적이고 영화적인 진저와 프레디의 시퀀스들에 비하면 그냥 따분합니다. 더 나쁜 건 던과 랜돌프 스코트가 나오는 연애 이야기가 거의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갈등도 뻣뻣하고 연애도 뻣뻣하고 해결방법도 뻣뻣해요. 이들이 나오는 장면들 중 유일하게 재미있는 건 엘리베이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 정도인데, 이 장면들 역시 배우들보다는 3층으로 세워진 거대한 세트와 그만큼이나 거대한 카메라 크레인의 덕을 더 보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 좋은 부분은 모두 진저와 프레드가 나오는 장면들입니다. 던과 스코트가 분위기를 죽여놓으면 진저와 프레드가 발랄하게 짠 하고 튀어나와 춤과 노래로 분위기를 바꾸어 놓지요. [I'll Be Hard To Handle]처럼 충동적으로 휙휙 튀어나오는 경쾌한 댄스 넘버도 좋고 제목부터 아이러니컬한 프레드의 [I Won't Dance]의 독무도 좋아요. 유명한 [Smoke Gets in Your Eyes]를 아일린 던이 먼저 부르긴 하지만 나중에 진저와 프레드가 같은 곡에 맞추어 멋진 댄스를 추기도 하니 손해본 건 없다고 할 수 있죠. 전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이들의 가벼운 구애 장면도 좋았어요. 던과 스코트와는 달리 이 영화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유희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07/06/13)


★★★


기타등등

무명 시절의 루실 볼이 마지막 패션쇼 장면에 잠시 나옵니다. 


감독: William A. Seiter 출연: Irene Dunne, Fred Astaire, Ginger Rogers, Randolph Scott, Helen Westley, Claire Dodd


IMDb http://www.imdb.com/title/tt002694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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