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H.C. Potter 출연: Fred Astaire, Ginger Rogers, Edna May Oliver, Walter Brennan, Lew Fields, Etienne Girardot

[버논과 아이린 캐슬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작품입니다. 실존인물과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결말이 비극인 유일한 진저와 프레드 영화지요. 스포일러일까요? 저는 결말을 모르고 봤습니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은 모두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었을 거예요. 버논과 아이린 캐슬은 당시 유명인사였으니까요. 아이린 캐슬은 이 영화에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죠.

버논과 아이린 캐슬은 도대체 뭐하던 사람들이냐. 이들은 1910년도에 인기있었던 댄서 커플입니다. 영화에 따르면, 영국 출신 코미디언이었던 버논은 우연히 휴양지 라 로셀에서 연예인 지망생이었던 아이린 풋을 만납니다.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버논이 훌륭한 댄서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이린의 아이디어를 따라 둘은 댄서로 전업합니다. 이들은 유명인사가 되어 유럽과 미국을 누비지만 한참 절정기일 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지요. 버논은 영국 공군에 입대하고 결국 비행기 추락으로 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쟁 중에 죽은 게 아니라 텍사스에서 일어난 비행사고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요. 하여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진저와 프레드가 출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들 콤비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니까요.

뮤지컬 영화로서, [버논과 아이린 캐슬의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흐릿합니다. 물론 진저와 프레드는 이 영화에서도 멋진 댄서입니다. 춤 장면도 많이 나오고요. 하지만 이들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기억에 확 남는 댄스 넘버는 없어요. 영화가 춤 자체에 포인트를 맞추지 않은 것이죠. 이 영화에서 춤은 댄서 커플 캐릭터를 설명하는 도구의 역할에 더 충실하고 늘 스토리 전개 속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드라마로서, 이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도입부는 두 사람이 만나 스타가 되는 뮤지컬 성공기인데, 사실 큰 재미는 없습니다. 둘이 너무 일찍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이들 영화 특유의 밀고 당기기가 부족하고 이들의 역경도 너무 쉽게 해결되지요. 후반부는 비극적인 전쟁 멜로드라마인데, 이쪽이 더 울림이 강하고 좋습니다. 이야기 자체야 갑작스러운 세계대전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연인들의 애달픈 연가이니 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중간만 해도 먹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역할을 진저와 프레드가 연기하고 있다고요. 다들 해피엔딩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커플이 말입니다! 단지 메시지가 너무 분명한 게 걸리긴 해요. 이 영화가 나온 게 1939년이니, 프로파겐다의 성격을 갖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만 말입니다.

[버논과 아이린 캐슬의 이야기]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마지막 RKO 영화입니다. 이들의 마지막 영화는 아니에요. 나중에 MGM 뮤지컬 영화 [브로드웨이의 바클리 부부]에서 다시 재회하긴 하니까요. 그래도 이 영화가 한 시대의 끝을 장식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요. 그리고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영화는 썩 잘 어울립니다. (09/01/28)

★★★

기타등등

소문에 따르면 아이린 캐슬은 이 영화에 그렇게까지 만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일단 아이린의 흑인 하인 월터 역을 백인 배우 월터 브레넌에게 주었던 것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오리지널 의상을 고치려고 하는 진저 로저스와도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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