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섬 Isle of the Dead (1945)

2010.02.13 17:22

DJUNA 조회 수:3744

감독: Mark Robson 출연: Boris Karloff, Ellen Drew, Marc Cramer, Katherine Emery, Helen Thimig, Alan Napier, Jason Robards Sr.

1.

이 사진은 스위스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이 그린 유명한 [죽음의 섬]입니다. 이 어두컴컴한 그림의 우울한 로맨티시즘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기생하며 다양한 장르에 스며들었지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죽음의 섬]이라는 교향시를 썼고 로저 젤라즈니는 [죽음의 섬]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발 루튼은 이 어두컴컴한 영화 [죽음의 섬]을 만들었죠. 루튼은 영화 초반에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섬 전경을 잠시 보여주는데, 그 섬의 모습이 뵈클린의 그림과 거의 같습니다.

2.

발칸 전쟁이 한창이던 1912년. 니콜라스 페리데스 장군은 미국인 종군기자 올리버 데이비스와 함께 아내의 묘지가 있는 섬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묘지는 오래 전에 약탈된 뒤였고 섬에 퍼진 전염병 때문에 그들은 전쟁터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죠. 전염병으로 섬 사람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동안 페리데스 장군은 서서히 광기에 휩싸입니다. 그는 그리스인 간호사인 테아가 그리스 식 흡혈귀인 브리콜라카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3.

발 루튼이 초자연현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걸 싫어했다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죽음의 섬]은 그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영화를 끌어가는 것은 브리콜라카의 전설이지만 우리는 테아가 정말 브리콜라카인지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루튼은 관객들을 미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위기로 끌어들이지만 사건은 모두 상식적으로 설명한 수 있는 수준에서 마무리됩니다.

다시 말해 '반전 도형' 같은 거죠. 우리는 이 스토리를 상식적인 시점으로도, 초자연적인 시점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결말도 이중적이 되지요. 영화는 될 수 있는 한 상식적인 수준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요.

이 애매한 설정은 영화에 몇몇 흥미로운 비틀림을 부여합니다. 특히 테아의 존재가 그렇지요. 테아 자신도 자기가 브리콜라카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영화 중반에 매우 필립 K. 딕 풍의 고뇌에 빠집니다. 페리데스 장군이 테아의 어린 시절 추억의 신빙성을 부인하는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블레이드 러너] 풍입니다.

4.

뵈클린과 함께 이 영화에 음울한 터치를 더하는 예술가는 에드가 앨런 포우입니다. [죽음의 섬]을 장식하는 요소들인 '너무 이른 매장', 죽음에 대한 로맨틱한 집착, 어두컴컴한 묘지와 같은 것들은 포우의 시에서 그냥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칼로프가 연기하는 페리데스 장군도 너무나 포우 풍이고요.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너무 이른 매장'입니다. 영화 후반부를 장식하는 세인트 오브린 부인의 매장 에피소드는 요새 봐도 무시무시하죠. 직접적으로 포우의 소설을 영화한 작품은 아니지만 [죽음의 섬]은 포우의 정수를 가장 잘 끄집어낸 영화입니다.

5.

많은 발 루튼 영화들이 그렇지만 이 영화에도 악역은 없습니다. 테아에서부터 페리데스 장군까지 모두 희생자들일 뿐 악의를 품은 가해자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통 이상으로 선량하고 자기 자신에 엄격한 사람들이죠.

그렇지만 루튼 영화를 으시시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악역의 부재입니다. 루튼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은 구체적인 악당의 사악함이 아니라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광기와 어두운 힘입니다. 우리의 어설픈 이성과 도덕률은 그 파괴력에 맥을 못추며 무너지고 그 때문에 재앙이 시작되는 거죠.

[죽음의 섬]에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우행을 그 힘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는 일단 전쟁의 끔찍한 상처를 보여준 뒤 중심 스토리가 전개되는 묘지로 가득찬 섬으로 들어가는데, 이 죽음의 섬에서 페리데스 장군이 벌이는 액션은 그가 전쟁터에서 벌인 일과 같습니다. 목적은 고결하지만 그 결과는 자기와 남을 파멸시킵니다.

6.

[죽음의 섬]은 [시체 도둑]이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와 같이 매끄러운 걸작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시동이 걸릴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리고 몇몇 장면들은 아주 건성으로 처리된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거칠지만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영화가 품고 있는 대책없는 비관주의 때문일까요? 아니면 마크 롭슨과 루튼이 창조한 끝내주는 분위기 때문일까요? 아마 둘 다일 거예요. (99/02/22)

★★★☆

기타등등

이 영화를 찍을 때 보리스 칼로프는 정말로 심하게 아팠답니다. 그 때문에 루튼은 몇 개월 동안 영화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대요. 그 때문에 칼로프의 모습이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그래도 그의 쇠약한 외모는 내용과 아주 잘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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