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호의 비극 A Night to Remember (1958)

2010.02.13 18:41

DJUNA 조회 수:3800

1.

이 영국 영화를 처음 본 게 아마 초등학교 때일 거예요. 그 때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살아있던 고 정영일 아저씨가 이 영화에 별을 네 개 딱 주고는 (아마 별은 레너드 말틴 가이드에서 빌려왔었겠죠) '걸작!'이라는 거창한 딱지를 붙여서 주말 영화 소개란에 내놓았으니,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죠. AFKN 영화라 대사는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그래도 타이타닉이 꼬로록 가라앉는 장면에 감동(?)했던 거랑 캘리포니안 호 선장의 방만한 행동에 열받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새로 신설된 EBS [일요시네마]의 첫 영화로 이 영화가 다시 방영되었습니다. 앞의 두 장면만 빼면 별로 기억나는 것도 없는 터라 (났더라도 다른 타이타닉 영화들의 장면들과 마구 뒤섞여서 구별이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새로 보는 것 같더군요.

2.

지금까지 [A Night to Remember]는 가장 훌륭한 재난 영화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괴물같은 새 [타이타닉]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가장 휼륭한 타이타닉 영화이기도 했지요.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며 중얼거렸단 말도 '이미 [A Night to Remember]가 있는데, 무엇하러 또 돈들여서 타이타닉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였죠.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한데, 이 영화가 상당히 잘 만든 영화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렇게 된 이유는, 재난 영화가 빠지기 쉬운 몇몇 함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그랜드 호텔' 영화가 아닙니다. '재난 영화=그랜드 호텔'이라는 단순한 공식이 먹혔던 70년대 재난 영화들을 들여다보면, 이 선택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재난과 인간 군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아주 우스꽝스럽게 끝나기 마련이니까요. [타워링]과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A Night to Remember]는 목표를 아주 작게 잡았습니다. 월터 로드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목적은 드라마를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몇 십 년 전에 일어났던 거대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영화에는 만들어낸 인물들이 거의 없으며 영화에 그려지는 사건들의 대부분은 실제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관객들이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의 유사점에 당황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진 네그레스코의 [타이타닉의 최후]와 같은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를 창조해 첨가한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카메론의 [타이타닉]이 '사실'을 그리려고 시도하는 장면의 상당수는 이 영화의 스토리와 거의 겹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는다는 목표(스파이 소설 작가 에릭 앰블러의 저널리스틱한 각본도 이런 목표에 한 몫 했습니다)는 영화를 조금 건조하지만 박력있고 인위적이지 않은 영화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랜드 호텔물들처럼 가지치지 않는 각본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개별 인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배가 가라앉는다'는 사건이 아니었습니까?

4.

이 영화를 [타이타닉]과 비교하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잘나가는 인터넷 평론가 제임즈 베라디넬리는 이런 시도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게티스버그]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 정도로 영화가 심하게 차이나지는 않고 유사한 점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시계 앞에 서 있는 앤드류즈'와 같은 장면은 분명히 [A Night to Remember]의 영화 버전에서 빌려온 것인데 (책에는 없답니다. 당연하죠. 그 때 거기에 있었다면 살아서 증언을 할 수도 없었을테니까!) 이걸 표절로 보느냐, 아니면 오마쥬로 보느냐는 관객 맘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죠. :-)

하지만 베라디넬리의 기본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가 가공의 두 주인공을 통해 순수의 시대의 종말이나 페미니즘, 러브 스토리 기타 등등과 같은 커다란 걸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A Night to Remember]는 사건 재현 이상의 욕구는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후자에 인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인위적인 조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사건 자체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같은 용감무쌍한 신파도 없습니다. 에릭 앰블러는 카메론보다 훨씬 좋은 작가였고 또 매우 '영국식'으로 지적인 남자였기 때문에 감정을 과장하는 일 같은 것은 하 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그랜드 오페라와 같았던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달리, [A Night to Remember]는 영국식으로 정직합니다.

업데이트된 측면은 어떨까요? [A Night to Remember]가 세월의 때를 탄 부분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특수 효과는 어때요? 카메론의 디지탈 게임과 비교해서 보면 [A Night to Remember]의 특수효과는 다소 초라합니다. 하지만 특수효과는 당시의 기술 수준에 맞추어 평가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매우 우수한 수준이고 영화를 보노라면 대충 익숙해집니다.

오히려 1985년, 로버트 발라드가 타이타닉의 잔해를 발견한 뒤 새로 추가되고 교정된 역사적 사실들이 이 영화를 약간 구식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중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배가 두조각 났다는 증언들이 이제 정설이 된 것이겠죠. 새로 발견된 증거들과 증언의 재해석은 타이타닉 사건의 역사적 관점 역시 상당히 바꾸어서, [A Night to Remember]의 몇몇 사건들을 조금 위선적으로 보이게도 만듭니다.

가장 차이가 나고 또 비교할 만한 것은,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카메론의 타이타닉은 분명히 자연의 힘에 박살나는 문명의 오만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A Night to Remeber]에서 타이타닉의 침몰은 오히려 문명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시행착오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라이톨러의 비장한 대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에필로그는 카메론의 [타이타닉]보다 훨씬 낙관적인 결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5.

이 영화는 스타나 튀는 연기가 없는 작품이므로 배우에 대해서는 언급할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아름답고 젊었던 시절의 오너 블랙맨이 1등 승객 중 한 명으로 나오니 심심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이 영화의 실존인물들과 카메론의 [타이타닉]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을 비교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몇몇 외모의 유사성은 꽤 흥미진진합니다. (98/09/06)

★★★★

기타등등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겨우 168만 달러였습니다. 인플레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참... 싸죠?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