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론의 대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1988)

2010.02.19 23:39

DJUNA 조회 수:3914

감독: Terry Gilliam 출연: John Neville, Sarah Polley, Eric Idle, Oliver Reed, Charles McKeown, Winston Dennis, Jack Purvis, Valentina Cortese, Jonathan Pryce, Bill Paterson, Peter Jeffrey, Uma Thurman, Alison Steadman, Ray Cooper, Robin Williams

이 영화의 주인공 칼 프리드리히 히에로니무스 폰 뮌히하우젠 남작은 실존 인물입니다. 1720년에 태어나서 1797년에 죽은 중부 독일의 군인이자 수렵가이자 여행가지요.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허풍쟁이가 된다고 하는데, 뮌히하우젠 남작은 그 극을 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허풍이 얼마나 심했는지, 폭탄을 타고 적진으로 날아가 고공 탐색을 나섰다고 주장할 정도였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에게 '허풍선이 남작'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1785년, 영국에 망명한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라는 독일 사람이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에 바탕을 둔 이야기집을 영어로 펴냈습니다. 나중에 이 책은 1786년에 독일의 로맨티스트 시인인 A. 뷔르거에 의해 다시 독일어로 번역되고 13편의 이야기가 더해져서 [뮌히하우젠 남작의 놀라운 수륙 여행과 출진과 유쾌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요.

뮌히하우젠 남작의 유쾌한 모험담은 곧 세상 사람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라스페와 뷔르거의 책은 여러가지로 변형되거나 각색되어서 지금도 읽히고 있습니다. 성인용으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요새는 아동문학으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듯 합니다. 저 역시 뷔르거의 책을 적당히 아동용으로 옮긴 계림출판사의 명작문고판을 가지고 있어요. 여전히 심심할 때마다 읽는 책입니다.

그의 모험담은 영화로도 여러차례 옮겨졌습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영화는 43년에 제작된 [Münchhausen]입니다. 괴벨스가 UFA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을 명령한 영화지요. 히틀러가 이런 종류의 현실 도피 판타지 영화를 좋아했다고 하니, 그의 취향이 반영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뮌히하우젠을 통해 이상적인 아리안 영웅을 그려내려는 정치적인 속셈도 있었을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온 작품은 [Baron Prásil]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카렐 자멘의 체코 영화입니다. 당시 체코가 독점하다시피했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장편이지요. 이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영화가 바로 우리가 다룰 테리 길리엄의 영화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입니다. 이 작품은 [시간 도둑 Time Bandits], [브라질 Brazil]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가장 야심찬 작품이었고 당시만 해도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작품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가장 흥행에 실패한 영화이기도 했죠. 이 작품 덕택에 콜롬비아 영화사가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으니까요.

라스페와 뷔르거의 원작을 따르고 있는 앞의 두 영화와는 달리, 길리엄의 영화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본편 없는 속편입니다. 그게 서운하다면 43년에 만들어진 독일 영화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의 시대 배경은 18세기 말. 터키군에 포위된 작은 도시입니다. 전쟁으로 지친 사람들이 극장에서 솔트 극단이 공연하는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뮌히하우젠 남작이라고 자칭하는 노인네가 튀어나와 연극이 엉터리라고 떠들어대죠. 남작은 자기가 진짜라고 믿는 극단장의 딸 샐리와 함께 그의 네 하인들을 데려와 도시를 구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납니다.

길리엄의 영화가 우리를 끌고가는 곳들은 이미 라스페와 뷔르거를 통해 이전에도 한 번 방문했던 곳들입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거인들이 사는 달 세계, 벌컨이 다스리는 지구 중심의 지하 세계, 삼켜진 배들이 우글거리는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 물론 각자 엄청난 장기를 가진 남작의 네 부하들도 원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길리엄은 이 옛 소재들을 완전히 새롭게 꾸밉니다. 우선 이 영화에는 이전 작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화려한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절정에 다다른 구식 특수 효과와 단테 페레티, 가브리엘라 페스쿠치와 같은 치네치타의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바론의 대모험]의 시각적 체험은 너무나도 풍요로워서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입니다. 달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달 왕족들의 머리, 머리 셋 달린 새, 수천 척의 배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물고기... 그리고 무엇보다 보티첼리의 그림을 흉내내며 조가비에서 나오는 우마 서먼의 비너스가 있죠.

물론 영화는 전형적인 뮌히하우젠식 액션에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대포알을 타고 날아가거나, 모자라는 줄을 보충하기 위해 위의 줄을 잘라서 아래에 붙이는 말도 안되는 모험담들 말이에요. 그 절정은 후반부에 펼쳐지는 터키군과의 전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른 뮌히하우젠 영화들로부터 갈라놓는 진짜 차이는 그 주제입니다. 길리엄의 뮌히하우젠은 단순히 쾌활한 모험가가 아닙니다. 길리엄은 산문적이고 건조하고 억압적인 집단과 창조적이고 모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개인과의 대결을 그려내기 위해 뮌히하우젠을 이용했습니다. 갑자기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진지해진 것입니다.

이런 변형은 꽤 수상쩍을 수도 있고 솔직히 개인적으로 아주 동감하지도 못하겠지만, 18세기 말이 로맨티시즘이 서서히 태어나던 시기였다는 걸 고려해보면 시대도 맞으며, 길리엄식 주제가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 역시 매우 동키호테적으로 감동적입니다.

길리엄은 여기에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을 첨가합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18세기는 순수한 18세기가 아니죠. 미친 이탈리아 왕족과 18세기 철학자들을 결합한 듯한 달세계인들은 그냥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치 20세기 군수업자처럼 구는 벌컨은 특히 튑니다(그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싸우면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길리엄은 슬쩍슬쩍 현대적인 농담들을 뒤섞으며 영화를 어린이용 판타지와 성인용 코미디 사이에 밀어넣습니다. 종종 엉뚱한 스텝을 밟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꽤 재미있어요.

캐스팅도 훌륭합니다. 존 네빌(국내 관객들은 [엑스 파일]의 매니큐어 잘 칠한 아저씨로 기억하겠지만요)은 뮌히하우젠 남작역에 그처럼 잘 어울릴 수가 없고, 막 주연 데뷰한 어린 시절의 사라 폴리는 깨물어줄만큼 귀엽고 연기도 잘한답니다. 우마 서먼과 올리버 리드 역시 완벽한 비너스와 벌컨입니다. 에릭 아이들 역시 시원스러운 코미디를 선보이고, 호레이쇼 잭슨을 연기한 조나단 프라이스도 기가 막힙니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종종 시간 배분을 잘못해 늘어지고, 달세계, 지하세계, 물고기 뱃속으로 이어지는 모험담은 툭툭 끊기며,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이 지나칠 정도로 뒤섞이는 터에 이야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기도 하죠. 특히 환상이 현실을 집어삼키는 후반부를 이치에 닿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습니다. 하여간 워낙 담은 게 많아서 질적으로 쉽게 실패할 수가 없는 영화였어요. 이와 같은 영화가 상업적 재난이었다니 슬픈 일입니다. (00/10/01)

★★★

기타등등

1. 길리엄의 삼부작은 국내 출시 제목들이 모두 끔찍했지요. 하긴 [바론의 대모험]은 [사차원의 난장이 이티]나 [여인의 음모]보다 낫습니다.

2. 사라 폴리의 아버지 마이클 폴리가 포수들 중 한 명으로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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