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죽이기 (1994)

2010.03.13 23:56

DJUNA 조회 수:8117


1. 선례

강우석은 독창성으로 칭찬받을만한 감독은 아닙니다. 그는 리듬을 잘 탈 줄 알고, 시류를 잽싸게 이해하며, 줄거리의 각 요소들을 능숙하게 배치할 줄 압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하죠. 이런 능력들은 상업영화감독에겐 큰 밑천입니다. 하지만 독창성은 그의 장기가 아니에요.


이미 그는 [투 캅스]로 표절시비에 말려든 적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마이 뉴 파트너]보다 [투 캅스]를 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만.)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만든 다른 영화들에도 그와 유사한 선례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 맘마]는 마이클 키튼 주연의 코미디 [미스터 맘]과 제목부터가 유사하지 않습니까?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Z]나 [블로우 아웃]과 같은 영화와 여러군데가 유사하고요.


[마누라 죽이기] 역시 수많은 선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태초부터 남편들과 아내들은 꾸준히 서로를 죽여왔으니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우선 제목도 비슷한 잭 레몬 주연의 [아내 죽이는 법]이 있고, 제가 아주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인 데시카의 [이탈리아식 이혼 풍습]이 있으며, 파트리스 르콩트의 [탱고]도 있습니다. 약간 넓혀보면 존 휴스턴의 [프리지 가의 명예]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영화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레지널드 헐의 고전적인 도서추리소설 [백모 살인사건]이 [마누라 죽이기]와 유사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누라 죽이기]의 봉수처럼 [백모 살인사건]의 에드워드도 죽어라고 살인을 저지르려고 하지만 계속 실패합니다. 제목도 같은 식의 말장난이 가능하고요. 즉, '마누라'를 꼭 목적격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2. 블랙 코미디

상식적인 분류 기준에 따르면 이 영화는 당연히 블랙 코미디입니다. 살인은 일반적으로 쉽게 웃고 즐길만한 소재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는 잘된 블랙 코미디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비틀린 쓴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영화는 재미있고 깔깔거리면서 웃을 만한 부분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너무 밝아요. 너무 밝아서 영화가 끝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과연 서로를 죽이려고 기를 쓰는 두 부부의 이야기를 이렇게 심심풀이 땅콩으로 보아도 될까?'


적어도 이런 주제를 다루어야 할 때는 소재의 어두운 면에 대해 개념이 잡혀져 있어야 합니다. 그 갈등 구조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요인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인물 성격은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그래야 영화의 진짜 유머가 살아납니다.


하지만, 강우석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애당초부터 그의 관심은 '마누라 죽이기'라는 노골적이고 단순한 아이디어 자체에 쏠려 있었으니까요.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남편이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계속 실수한다는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플롯 자체였죠. 그러니 소재 자체에 대한 이해가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쉬운 일이에요. 이 소재는 훨씬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요. 완성된 영화는 단순히 재미있는(그리고 좀 믿을 수 없는)이야기만 들려줍니다. 데미 소다에 탄산이 다 빠져 있다고 할까요?


3. 리듬

[마누라 죽이기]의 리듬감은 전체적으로 뛰어난 편입니다. 감독과 각본가는 스토리의 완급을 어디다 배치해야 할 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재치있는 반복도 나쁘지 않고, 작은 반전들도 좋습니다. 관객을 잡아주고 풀어주는 게임을 꽤 잘하는데, 일단은 마음에 들더군요.


하지만,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강우석은 속도가 빠른 장면에서는 꽤 잘합니다. 그러나 '완'의 부분에서는 너무 처지고 통속적이고 평범해집니다. [투 캅스]에서도 이런 기미를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마누리 죽이기]는 '완'과 '급'의 장면이 너무나도 차이가 뚜렷해서 통일성이 위태롭기까지 합니다.


4. 절약성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는 킬러와 봉수가 약수터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킬러는 이야기를 마친 뒤, 습관적으로 봉수의 물통을 들고 가려 합니다. 봉수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죠. "선생, 그건 내 물통입니다."


좋습니다! 좋은 농담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킬러는 물통을 바꾸며 '습관'이라고 해명합니다. 이미 충분히 효과를 거둔 유머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나중에 다시 되풀이 됩니다. 유모차를 바꾸려는 킬러를 소영이 째려보자(이 장면 자체는 구성상 나쁘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 습관을 바꾸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장면들이 이곳저곳에 발견됩니다. 봉수가 영동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를 끊고 곧 봉수가 진상을 알아차렸다면 모든 일은 더 경제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고, 소영이 숨겨놓은 아기 신발을 잡고 감상에 잠기는 촌티나는 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아도 좋았을 겁니다(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그 장면의 지독한 위선은 촌티를 넘어서 구역질까지 일으킵니다.)


경제성은 어느 예술 분야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코미디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죠. 강우석은 관객들의 지능지수를 좀 얕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희들보고 한마디 말하라면, 그 정도도 잽싸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관객은 신경쓰지도 말라고 하고 싶네요.


5. 배우

박중훈은 [투 캅스]에서처럼 재미있습니다. 킬러 역의 최종원도 역시 유쾌한 여러 장면을 만들어 주고요. 엄정화는 전체적으로 기능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고, 조형기는 영화보다는 자기의 이미지를 파는 데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두 무난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박중훈의 왔다갔다하는 표정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감독이라면, 꼭 그런 노골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요? 전에도 그랬지만, 강우석 영화의 인물들은 언제나 다소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한 배우인 최진실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은 겁니다. 흠, 이건 저희들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6. 그리고...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고 대사도 다소 작위적이고 어색했던 [투 캅스]의 것보다 좋습니다. 음악은 느린 부분이 촌스런 TV 연속극 백 그라운드 뮤직 수준이라 짜증나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빠른 부분에서는 그럴싸합니다. 봉수가 지푸라기 인형을 쿡쿡 찌를 때 나오는 음악이 [알라딘]의 '아라비안 나이트'와 비슷하던데, 표절인지 인용인지?


하지만 예리한 맛은 없는 코미디입니다. 인물 성격과 행동도 종종 믿을 수 없고요. 블랙 코미디의 제작에는 좀 못돼 먹은 사람이 한 사람 필요한데 [마누라 죽이기]의 제작진들이 너무 사람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꾸 소영의 마지막 미소가 거슬립니다. 감독이 주제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증거가 아닐지요? (94/12/17)


★★


기타등등


감독: 강우석 출연: 박중훈, 최진실, 최종원, 엄정화 다른 제목: How To Top My Wife


요새 엄정화의 모습과 이 영화의 엄정화를 비교해보면 그 동안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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