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2006)

2010.02.22 22:30

DJUNA 조회 수:5026

감독: 변승욱 출연: 한석규, 김지수, 이한위, 정혜선, 김성녀, 김지현, 이지현, 최반야, 최철호, 백지원 다른 제목: Solace

여자 주인공 혜란. 어렸을 때는 남부러울 것 없이 넉넉하게 살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몇 억의 빚을 남기고 죽은 뒤로는 동대문에서 짝퉁 디자이너로 일하며 빚을 갚고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연애 힘들고 결혼은 더욱 더 어려워요.

남자 주인공 인구. 동네에서 그럭저럭 돌아가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노총각 소릴 들을 나이지만 아직 결혼을 못 했어요.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형 인섭 때문에 여자들이 꺼려하기 때문이죠.

이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근처 동네에 살 거든요. 혜란은 가끔 인구의 약국에 들러 술 깨는 약이나 수면제를 삽니다. 그러다 눈이 맞은 둘은 같이 모텔로 들어가고 데이트도 좀 하고 나중엔 여행도 떠나요. 엄격하게 따지면 이들을 가로막을만한 장애는 없죠. 둘 다 독신이고 사귀는 사람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른 로맨스만이 로맨스의 장애가 되는 건 아니죠. 이들에겐 멜로드라마틱한 설정보다 현실의 무게가 더 큰 장애가 됩니다. 뭐, 혜란은 아마 인섭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집안 빚 5억을 청산하기 전까지 결혼이나 연애는 사치죠.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로맨스 영화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기엔 혜란과 인구의 연애담 비중이 너무 낮죠. 영화가 오히려 더 깊이 다루고 있는 건 두 사람의 가족 관계입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의 짐이 상당히 무거운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서도 결국엔 가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영화가 가족만큼이나 집중하고 있는 건 많은 대한민국 중산층 사람들이 뼛속 깊이 체험하고 있는 경제적 고충입니다. 물론 혜란네 가족의 빈곤은 상대적이죠. 자기 가게와 집이 있고 끼니 걱정 없으며 (일 때문이지만) 해외 여행을 할 여유도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여전히 마이너스입니다. 아무리 악착같이 돈을 벌어봐야 은행빚을 간신히 갚는 것도 벅차지요. 혜란이 이 악순환에서 몇 년 안에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살아있는 것도 로맨스의 가슴 떨림이 아니라 이 출구 없는 꽉 막힌 느낌입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다듬었다면, 조금만 더 작정하고 로맨스와 삭막한 일상의 대립에 매달렸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힘있는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최종 버전의 힘은 설정 자체보다는 약하군요. 연출은 그냥 충무로 로맨스 영화의 표준으로 그치고, 일상의 섬세한 디테일을 포착해 내는 힘은 떨어지며, 전체적으로 조금 밍밍합니다.

배우들의 경우, 익숙해진 매너리즘 안에서 그냥 편하게 연기하는 한석규보다, 일상의 짜증에 지쳐 까칠해진 직장여성을 연기하는 김지수 쪽이 조금 더 덕을 보고 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인이라는, 거의 선물에 가까운 역을 맡은 이한위도 결코 손해보는 장사를 한 건 아니었고요. (06/11/20)

★★★

기타등등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제목을 완전히 잘못 잡은 영화입니다.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는 짐작가요. 의미도 알겠고. 하지만 이 장황한 제목에 어울릴 정도로 영화가 로맨스에 충실한 건 아니에요. 혜란과 인구의 로맨스는 영화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영화가 다루는 그들의 삶의 영역도 훨씬 넓고요. 원래 제목인 [미열]이 훨씬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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