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따윈 필요없어 (2006)

2010.03.05 11:24

DJUNA 조회 수:5398

감독: 이철하 출연: 김주혁, 문근영, 도지원, 진구, 이기영, 최성호, 서현진, 조상건, 박진영, 박리디아, 조재윤 다른 제목: Love Me Not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2002년에 TBS에서 방영되었던 10부작 미니 시리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전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볼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시리즈의 대중적 인기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통속적이지만 무척 효과적인 설정이었어요. 물론 설정보다 그 설정을 살리는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한 법이지만요.

영화에서 그 기본 설정이라는 건 출소한 뒤 사채 때문에 28억원을 당장 구해야 하는 줄리앙이라는 호스트가 눈먼 상속녀 류민에게 접근한다는 겁니다.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아버지와 동생을 떠난 오빠 류진은 줄리앙의 직장 동료였고 둘의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에 죽었죠. 줄리앙은 류진으로 변장하고 아버지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당연한 일이지만 류민과 사랑에 빠집니다. 재수없게도.

아까도 말했지만 전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을 이미 본 사람을 시사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원작은 영화보다 덜 어처구니없고 더 꼼꼼하며 덜 과장되어 있는 모양이더군요. 특히 예술영화인 척 하면서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결말을 심은 것에 대해선 무척 화를 내더라고요. 원작의 결말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저도 그게 나은 것 같습니다.

영화 버전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장황한 드라마타이즈 뮤직 비디오 같은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대사들은 인공적이며 모든 게 극도로 진부하고 공식적인 관습에 갇혀 있지요. 이들은 보성 녹차 밭 한가운데에 세워진 대저택이나 어린이 대공원의 벚꽃 축제와 같은 로케이션의 도움을 빌어 때깔좋게 포장됩니다. 보기는 좋아요. 하지만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때깔이 좋고 공식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야기는 그 공식에서 어떻게 탈출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각색이 나쁩니다. 이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사실인데.

배우들의 캐스팅도 위태롭습니다. 김주혁은 그냥 다른 영화에서 호스트로 나왔다면 먹혔을 거예요. 적당히 능글맞고 적당히 바람둥이 같으니까요. 하지만 문근영과 같이 나올 때, 그는 그냥 삼촌 같습니다. 이건 화학반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논리의 문제이기도 하죠. 회상장면에서 보면 류진과 류민의 나이차는 기껏해야 두 살에서 세살 정도이고 류진의 유골에 적힌 탄생일로 계산해보면 다섯 살 정도입니다. 당연히 줄리앙이 류진으로 통하려면 나이가 비슷해야 하고요. 그렇다면 뭡니까, 줄리앙이 임수정보다 어리단 말인가요? 이런 망발이!

문근영 역시 자기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화 내내 어른을 흉내내는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역시 설득력 있는 설정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독은 배우의 장단점을 통제하고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그 때문에 이 배우의 혀 짧은 발음과 위태로운 호흡은 방치되고, 진지한 드라마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하는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엽고 예쁜 눈먼 소녀 팬시 인형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아름다운 대신 번지르르하고, 설득력 있는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사랑에 대한 진부한 캐치프레이즈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영화입니다. 슬프게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 중 몇 명은 작품의 진정성을 정말로 믿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06/11/03)

기타등등

1. 줄리앙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닭살이 돋아 미칠 것 같더군요. 요새 호스트 계에서는 50년대 복고 유행이 불고 있나요?

2. 주인공의 직업과 몇몇 설정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가 종종 떠오르더군요. [후회하지 않아] 쪽이 몇 배 더 낫습니다.

3. 요새 연달아 본 한국 신작 영화들은 모두 사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군요.

4. 충무로 영화쟁이들의 반딧불이 페티시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주실 분 계십니까?

5. 대사들만큼이나 제 신경을 건드렸던 건 너무나도 노골적인 연속극 음악들이었어요. 왜들 그렇게 뻔한 감정을 관객들 귀에 쑤셔넣으려고 작정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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