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피 할로우 Sleepy Hollow (1999)

2010.02.13 14:59

DJUNA 조회 수:6594

감독: Tim Burton 출연: Johnny Depp, Christina Ricci, Miranda Richardson, Michael Gambon, Casper Van Dien, Jeffrey Jones, Christopher Lee, Richard Griffiths, Ian McDiarmid, Michael Gough, Marc Pickering, Lisa Marie

(사건 진상을 모두 밝히지는 않겠지만 자잘한 스포일러들이 숨어 있습니다.)

듀나 가장 먼저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각색의 문제입니다. 형식상으로 이 영화는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단편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각색한 것입니다. 크레딧에도 '워싱턴 어빙 원작'이라고 나와있고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워싱턴 어빙의 공적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머리 없는 기사 이야기는 어빙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있던 전설이지요. 그런데 이 영화가 어빙의 원작에서 취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머리 없는 기사의 이야기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달라요. 이카보드 크레인은 겁쟁이 교사가 아니라 뉴욕의 괴짜 경찰관이며, 머리 없는 기사는 전설 속의 흐릿한 존재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연쇄살인마입니다. 카트리나 반 타셀과 브롬 반 브런트와 같은 인물들도 여기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입니다. 피투성이 연쇄살인으로 범벅이된 이 음산한 이야기는 어빙이 썼던 온화한 단편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파프리카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어떻게 각색해도 어빙의 이름은 들어갈 자리가 없을 걸요. 이카보드 크레인 이야기도 어빙 고유의 것이 아닐테니까요.

듀나 크레인이라는 캐릭터의 절묘한 성격은 어빙의 것이겠죠. 적어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워싱턴 어빙 원작'이라는 딱지를 달아도 될 만큼 어빙의 원작에 충실했습니다.

파프리카 그런데 지금 하려는 말이 뭐죠? 팀 버튼의 영화가 어빙의 원작을 충실하게 옮기지 않았다는 걸 비난하는 건가요?

듀나 그럴 수야 없겠지요. 제발 저를 순수주의자로 몰아붙이지 말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색'에 꽤 불만인 것은 사실입니다.

파프리카 구체적으로?

듀나 가장 불만인 것은 스토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초자연현상이란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모든 걸 당연하다는 듯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머리를 핑핑 돌려 복잡한 설명을 만들어내야 하죠.

앤드류 케빈 워커의 각본은 이 어중간한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 있습니다. 그는 초자연현상을 믿지 않는 한 남자를 초자연현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 스토리에서 크레인의 행동은 서커스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불신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신봉자가 되는 것까지만 해도 어설픈데, 그 초자연적 현상 속에서 여전히 이성적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니까요.

파프리카 브램 스토커는 비슷한 트릭을 [드라큘라]에서 훌륭하게 해냈지요.

듀나 하지만 앤드류 케빈 워커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스토커도 아주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했어요. 초자연현상은 너무 드러나면 힘을 잃습니다. 초자연현상을 다루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성적인 해결책 속에 살짝 암시만 해두는 것입니다. 바로 워싱턴 어빙이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에서 했던 바로 그 방법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괴물을 거의 현실 세계의 연쇄살인마처럼 다루는 워커의 각본은 그래서 별로 믿음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나마 스토리를 지탱하고 있는 추리 소설 플롯도 잘 짜여진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드러난 진상도 그렇게 화끈한 것이 아닌, 옛 소설들의 흉내일 뿐이지요. 크레인의 추리 과정도 대단치 않습니다.

로맨스도 그렇게 잘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워커는 크레인의 어린 시절을 카트리나의 캐릭터를 연결해서 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시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시도만 있을 뿐, 이들 사이엔 진짜 로맨스가 싹틀 공간은 없습니다. 크레인이나 카트리나나 모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파프리카 좋아요. 좋지 않은 각본이라는 거군요. 하긴 예상했던 답이었습니다. 원래 앤드류 케빈 워커를 별로 좋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듀나 과대평가 받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칭찬받는 [세븐]의 각본도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파프리카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앤드류 케빈 워커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의 공헌도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는 단독 작가도 아닙니다. 케빈 야거와 같이 썼지요. 대사 부분은 톰 스토퍼드가 다듬었고요.

무엇보다도 [슬리피 할로우]는 팀 버튼의 영화입니다. 사실 우리가 앤드류 케빈 워커만 가지고 이렇게 길게 끈 것 자체가 비정상적입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가장 먼저 끌어내야 할 사람은 팀 버튼입니다.

듀나 하긴 그래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워커의 각본 중 가장 나은 부분은 팀 버튼식으로 흘러갈 때입니다. 크레인을 죽음의 나무로 끌어가는 수법은 서툴지만 버튼에게 비주얼을 만들 기회를 제공할 생각이었다면 사정은 다릅니다. 노골적일정도로 선명한 초현실적 존재들도 선병질적이고 날카로운 버튼의 비주얼과 잘 맞습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죠. 팀 버튼에게 근사한 놀이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 각본은 나름대로 성공했습니다.

이카보드 크레인의 캐릭터도 나쁘지 않습니다. 원작만큼 섬세한 인물은 아니지만 적당히 팀 버튼 식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는 버튼의 이전 영화 주인공들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죠. 지나치게 예민하고 약간 맛이 간 괴짜 남자 말입니다.

파프리카 하지만 예전 캐릭터들과는 달리 무척 주류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는 액션 신들을 보세요. 거의 [레이더스] + [터미네이터]가 아닙니까? 버튼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남성적인 액션에 적극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남성적인' 것들은 늘 조롱받아왔죠. 액션영화라고 만든 [배트맨]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듀나 글쎄요. 전 그게 그렇게 '주류적인' 액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겁쟁이들은 오히려 그런 경우 더 엄청난 일을 해내는 일이 많죠. 전쟁터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이 등 뒤에 숨어서 부들부들 떠는 겁쟁이 남자가 진짜 크레인이고 이 인물은 주류 액션 영화의 영웅과는 다릅니다.

파프리카 밥 호프 풍의 코미디언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듀나 적어도 크레인은 버튼 식의 코미디언입니다. 하여간 전 이런 겁쟁이들의 모험담에 감명을 받습니다. 겁쟁이들의 용기야 말로 진짜로 흥미로운 것이니까요. 크레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위험에 접근해가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불이 난 애완동물 가게에 뛰어든 피위 허먼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둘 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폭력물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파프리카 카트리나 반 타셀은 어딘지 모르게 [가위손]의 위노나 라이더 캐릭터와 닮아 있습니다. 늘 라이더의 뒤를 따랐던 크리스티나 리치가 그 역을 하고 있고요. 하지만 카트리나는 분명한 캐릭터가 없이 흐릿하기만 합니다. 이 캐릭터의 진짜 가치도 비주얼적인 면에 있지 않나 싶어요.

듀나 사극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크리스티나 리치가 그처럼 팀 버튼의 세계에 잘 맞아떨어지는 걸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리치는 정말 그 사람 특유의 방식으로 예쁘면서도 나름대로 성인 배우처럼 보였지요.

파프리카 워싱턴 어빙의 원작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브롬 반 브런트가 아닐까요?

듀나 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영화가 반 브런트에게 나름대로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워커나 버튼은 모두 어빙의 단편을 읽으면서 크레인을 응원했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반 브런트가 카트리나와 결혼하는 원작의 결말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영화의 반 브런트는 바보같이 남자다움을 과시당하다 처참하게 죽는데, 둘 다 만들면서 꽤 고소해했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크레인을 영웅으로 만든 것도 그들의 보상심리였을 가능성이 커요. 크레인 자신도 이 영화를 보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겁니다.

파프리카 [슬리피 할로우]는 버튼의 영화답지 않게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거의 십분마다 누군가의 목이 잘려나가니까요.

듀나 그러나 그 폭력은 샘 레이미나 피터 잭슨의 피칠갑한 폭력과 다릅니다. 목 자르기는 시각적으로는 인상적이지만 몸서리칠만큼 끔찍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질겁하는 신체 손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비슷하게 체험을 했거나 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목자르기는 그런 것과 관계없죠. 우리의 경험과 상상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작 혐오감과 반발감을 충분히 주지는 않으니까요. 저한테는 레이디 반 타셀이 자기 손을 칼로 긋는 장면이 목자르기 전체보다 더 신경 쓰였어요.

파프리카 그래도 멋진 호러 장면들이 있지 않았나요? 특히 머리 없는 기사가 조산부네 집을 습격하는 장면은 근사합니다. 잘려나간 엄마의 머리가 바닥에 숨어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장면은 훌륭했습니다.

듀나 그의 호러는 무척 그림 형제 풍입니다. 잔혹하면서도 동화적이지요. 반 타셀 집안만 해도 전형적인 그림 형제식 결손가족이 아닙니까? 독일의 검은 숲을 연상시키는 축축하고 침침한 배경이나 마녀, 죽음의 나무와 같은 도구들도 같은 책에서 빌려온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슬리피 할로우]의 호러는 이상할 정도로 늦게 나온 셈입니다. 전 늘 그가 이런 영화를 이전에도 만들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그가 만든 최초의 '시대극'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는 늘 사극을 만들어왔거든요. 그가 만든 영화 중 우리가 사는 현대를 무대로 한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배트맨]의 무대는 중절모를 뒤집어 쓴 터프한 악당들이 돌아다니던 30년대에 가깝습니다. [배트맨 2]의 무대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국처럼 보이고요. [가위손]엔 50년대의 미국과 19세기 고딕 스토리의 배경이 뒤섞여 있습니다.

최초의 시대극이라는 [슬리피 할로우]에도 비슷한 시대착오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이 영화는 현대 배경에 과거를 끌어들이는 대신 과거 배경에 현대를 끌어들인다는 것이죠.

파프리카 많은 사람들이 해머 영화의 영향을 지적하기도 했죠.

듀나 분명 받기는 받았을 겁니다. 버튼 자신이 의식적으로 모방하기도 했을 거고요. 다루고 있는 시대 배경으로 보나 버튼 자신의 성장 시기를 보나, 해머 영화는 모방할 수밖에 없는 대상입니다. 크리스토퍼 리의 카메오 출연도 그 증거일 수 있죠.

그러나 생각만큼 닮아 있지는 않습니다. 해머 호러 영화들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와, 성적 욕망 그리고 무엇보다 노골적인 천박함으로 가득 찬 작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버튼의 영화가 그렇습니까? 버튼은 섹스보다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영화 속의 폭력도 해머 영화에서처럼 끈끈하지는 않습니다. 무척 깔끔해요. 그의 호러는 폭력이나 잔혹함, 사악함보다는 그로테스크함에 더 치중합니다. 그게 버튼 미학의 기초이기도 하고요.

[슬리피 할로우]는 시각적으로 무척 아름다우며 흥미로운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만약에 각본이 조금 더 창의적었다면 영화는 걸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도 팀 버튼의 새 영화에 목말라왔던 수많은 팬들에겐 멋진 선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00/02/01)

★★★

기타등등

1. [프리미어]에서 읽었는데, 버튼은 예고편을 보기 전까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하더군요. 사실 코폴라는 기획 단계 초기에 전화 몇 번 한 것 외엔 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

팀 버튼이 가장 좋아한다는 영화인 [사탄의 가면]을 모방한 장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레이디 크레인과 철처녀 장면이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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