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야 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 (2003)

2010.01.27 11:49

DJUNA 조회 수:3086

감독: Tim Supple 출연: Parminder Nagra, Claire Price, Chiwetel Ejiofor, Ronny Jhutti, Zubin Varla, David Troughton

팀 서플의 [십이야]는 2003년에 채널 4에서 방영된 텔레비전물입니다. 그래서인지 1.77:1의 화면비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영화 느낌은 들지 않아요. 그건 스튜디오 안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야외 장면들' 때문이기도 하고 텔레비전 냄새를 물씬 풍기는 전체적인 스타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플은 트레버 넌과는 달리 온전한 모양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용납할만한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지요. 이 작품에서 영화적 완성도나 매력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꼭 기대할 필요도 없겠지만.

서플의 각색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인종적 다양성입니다.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은 인도계입니다. 오르시노는 흑인이고요. 올리비아네 집안 사람들만 유럽계 백인들입니다. 시대 배경은 막연한 현대. 무대인 일리리아는 비교적 남쪽에 위치한 영국령 식민지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런 식의 설정은 비교적 논리적입니다. 특히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의 묘사는요. 서플은 이들 쌍둥이 남매를 정치가인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모국에서 탈출한 망명객들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건 이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달아줍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인종 카드로 조금은 설명이 가능해요. 주변 사람들이 이들에게서 막연한 인종적인 특징만을 보았던 거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파민더 나그라와 로니 주티는 여전히 다르게 생겼지만.

서플의 [십이야]는 다른 각색들보다 어둡고 침울합니다.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은 고국의 쿠데타와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요. 올리비아와 토비 경 역시 (교통사고로 죽은) 올리비아 오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고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와는 달리 이들의 고통은 진짜이며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의 코미디는 쉽게 뜨지 않습니다. 토비 경의 난폭한 장난들도 우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처럼 보이기도 해요. 토비 경과 머라이아는 말볼리오를 괴롭히는 중간에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한답니다. 토비 경과 앤드루 경이 얽힌 결투 장면들도 그들이 선택한 부엌칼이라는 살벌한 무기 때문에 장난스러운 느낌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서플은 사방으로 얽힌 주인공들의 사각 관계를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맺지도 않습니다. 이야기가 종결된 뒤에도 만족한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올리비아는 분명 실망했고 오르시노 역시 마지 못해 바이올라를 선택한 것 뿐입니다. 남매들 역시 자신들이 누군가의 대타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분위기는 [십이야]라는 희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습니다. 꼭 이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런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는 거죠. [십이야]는 우스꽝스러운 설정 코미디 속에 쓸쓸한 가을의 분위기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후자를 확장해도 셰익스피어의 의도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죠. 원작이 가진 감정의 스펙트럼은 어느 정도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축축한 분위기만 따로 떼어 즐기는 것도 꽤 괜찮군요.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말한다면... 글쎄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배우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인종에 따라 역할을 배정한 캐스팅 방식이 최선의 배우를 뽑는 데에 방해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말볼리오 역의 마이클 멀로니나 토비 경 역의 데이빗 트루턴처럼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오르시노 백작 역의 치웨텔 에지오퍼의 경우는 까다로운 대사에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시도해볼만한 시도였다는 데엔 동의하지만요. (05/06/06)

★★☆

기타등등

데이빗 트루턴은 제가 지금까지 본 토비 경들 중 가장 트림을 많이 한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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