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2006)

2010.02.06 22:26

DJUNA 조회 수:3740

감독: 김명화 출연: 정예지 다른 제목: A Passing Rain

(스포일러가 있어요.)

해리라는 여자애가 열심히 담벼락을 따라가며 "병욱아, 생일 축하해!"라고 쓰여진 종이들을 붙이고 있습니다. 척 봐도 짝사랑하는 여자애의 스토킹 행각이에요. 나중에 그 병욱이라는 애가 그것들을 발견하고 얼마나 민망해할까요. 해리는 자신에게 앞으로 닥칠 민망함에 대해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요? 암만 봐도 결과가 좋을 것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병욱과 해리가 앞으로 겪을 민망함은 우연히 길에서 해리를 발견한 학교 친구 다미의 민망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병욱이야 남이 저지른 일을 뒤집어 쓰는 거지만 다미는 해리처럼 자업자득이죠. 해리가 애써 붙여놓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따라다니면서 떼다가 결국 해리에게 사랑 고백까지 한단 말이에요. 최악의 타이밍이죠. 짝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힘든데, 짝사랑의 대상이 또다른 짝사랑을 공공연하게 떠드는 순간에 그 짓을 할 건 뭐람.

영화는 짧습니다. 8분 정도예요. 단편영화라면 당연히 이 정도 길이여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요새 나오는 단편들은 너무 길어요. 장편이 되려다 만 영화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우비]는 그렇게 길 필요도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담아내려고 하는 것은 지나가는 여우비처럼 짧은 순간이고 그 절정에 이르는 길은 담벼락에 종이를 붙이고 떼는 것과 같은 거의 수학적인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 순간을 체험하고 나면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는, 다미가 맘 속에 품고 있는 게 여우비처럼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한 때 감정인지 아니면 그보다 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드라마가 이 짧은 고백으로 끝나버릴지, 아니면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계속 이어질지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고요. 이런 건 사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것이 더 재미있죠. 영화 끝난 뒤에도 상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란 건 대부분 뻔하지만. (08/05/06)

★★★

기타등등

네이버 독립영화관에 올라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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