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Donatello Dubini, Fosco Dubini 출연: Jeanette Hain, Nina Petri 다른 제목: The Journey to Kafiristan

1939년, 두 명의 스위스인 여행자들이 포드 자동차를 타고 쮜리히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아프가니스탄의 북동쪽에 위치한 카피리스탄(이단자의 땅)이라는 곳이었지요. 당시 그곳은 아프가니스탄에 통합되고 원주민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해서 누리스탄(광명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테라 인코그니타, 즉 서구인들의 지도에 백지로 남은 몇 안되는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엘라 마일라르트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였습니다. 엘라 마일라르트는 민속학자이고 사진작가이며 스포츠우먼이었습니다.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마약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작가 겸 사진작가였고요. 두 사람의 목표는 조금씩 다르면서도 같았습니다. 표면상 마일라르트의 목표는 지도의 빈 자리를 채우고 아직까지 서구에 알려지지 않은 카피르족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슈바르첸바흐의 목표는 마약 중독을 극복하고 당시 서구인들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동방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여행은 도피였습니다. 유럽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곧 세계대전이 터질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이들의 여정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터키와 이란을 거쳐 가까스로 카불에 도착했을 무렵 전쟁이 터졌고 여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어요. 마일라르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도에서 머물렀고 슈바르첸바흐는 그 뒤로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떠돌다가 43년에 자전거 사고를 당한 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로 죽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모두 이 여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과 사진들을 남겼는데, 이것들은 도나텔로와 포스코 두비니의 영화 [카피리스탄으로 가는 여행]의 원작입니다.

영화는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를 나레이터로 삼아 진행됩니다. 두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아주 사실과 일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슈바르첸바흐가 터키 대사의 딸과 사랑에 빠져 스캔들이 일으킨 건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 훨씬 이전 일입니다. 당시 스캔들도 영화가 그린 것보다 훨씬 컸고요. 슈바르첸바흐와 마일라르트의 관계도... 하긴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것들뿐이니까요.

[카피리스탄으로 가는 여행]은 드라마틱한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러닝타임 내내 볼 수 있는 건 피로해 보이는 두 유럽인들이 포드 자동차를 타고 서아시아의 메마른 사막을 가로지르는 광경입니다. 가끔 그들은 이국적인 건축물 앞에 멈추어 우울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여객선이나 대사관에서 다른 유럽인들과 어울리기도 하며 원주민들의 세계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30년대 풍의 쉬크한 패션 감각을 거의 잃지 않는답니다.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마지막 것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이 여행과 관련된 사진들을 몇 장 보았는데, 슈바르첸바흐를 찍은 마일라르트의 몇몇 사진들은 사막을 배경으로 한 패션 잡지 화보 같았으니 말이죠.

영화는 처음부터 박진감넘치는 드라마를 의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하려는 건 그림같은 풍광의 변화와 함께 천천히 흘러가는 30년대 유럽인 여행가들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는 것이니까요. 서아시아의 오지로 떠나는 여행이 주가 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들의 정신은 여전히 유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듯한 장면이 후반부에 있습니다.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여정 중간에 만난 유목민 추장과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엇갈리는 대화를 나누는데, 슈바르첸바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은 에리카와 클라우스 만 그리고 그들과 얽힌 과거의 기억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리적 탈출을 시도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었던 탈주자들의 실패담입니다. [카피리스탄으로 가는 여행]은 우울한 영화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의 실패한 재활과정을, 다가올 파국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파시즘과 전쟁의 살육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유럽의 은유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시각적으로 영화는 아름답습니다. 30년대 유럽 패션과 서아시아의 메마른 풍경이 화면 위에서 그럴싸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인 두비니 형제는 소재에 맞는 냉정한 미니멀리즘과 우울한 로맨티시즘의 균형점을 거의 완벽하게 찾아냈습니다. 그를 통해 30년대 말의 유럽(아까도 말했지만 결국 이 영화는 유럽인들의 이야기니까요)을 그려내려는 시도 역시 성공했고요.

캐스팅의 결과도 비교적 좋습니다. 니나 페트리와 즈네트 하인은 엘라 마일라르트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역으로 처음 떠올릴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페트리는 거의 스위스 버전 라라 크로프트나 다름없던 모험가 마일라르트의 역을 맡기엔 연약하고 피로해보입니다. 하인도 늘 기숙사에서 탈출한 십대 소년과 같던 슈바르첸바흐의 이미지를 고려해보면 너무 성숙한 느낌이고요. 하지만 이들은 당시 시대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해석해내고 있고 자기만의 캐릭터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앙상블도 좋습니다. 특히 반쯤은 호사스럽게 퇴폐적이고 반쯤은 자신의 뇌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물 속에서 익사당한 듯한 마약중독자 작가를 그려내는 즈네트 하인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03/0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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