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점의 비밀 De Grønne slagtere (2003)

2010.03.14 22:27

DJUNA 조회 수:4244

감독: Anders Thomas Jensen 출연: Nikolaj Lie Kaas, Mads Mikkelsen, Line Kruse, Nicolas Bro, Aksel Erhardtsen, Bodil Jørgensen, Ole Thestrup 다른 제목: The Green Butchers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오기만 하면 되는 우리 문명인들은, 이 맛있는 고기가 밥상에 오를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 어떤 동물이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갔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이 그 동물의 시체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뼈를 끊었을텐데 말이에요.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고 싶어하는 이런 소재를 전면으로 끄집어내는 데엔 식인만큼 좋은 도구는 없습니다. 그냥 고기의 종류를 바꾸었을 뿐인데, 고기를 얻는 산문적인 과정은 살인이 되고 무덤으로 들어가야 할 시체는 저녁 밥상에 오릅니다. 자기만 예외인 척하며 먹이사슬 밖에서 깐쭉거리던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연의 순환 속에 통합됩니다.

[정육점의 비밀]의 주제 역시 식인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비야른과 스벤트는 덴마크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막 자기들만의 푸줏간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바로 그 날 밤 전기기술자가 창고 안에서 사고로 죽어버리고, 겁에 질린 스벤트는 시체의 넙적다리를 잘라 마리네이드를 만들어버리죠. 당연한 일이지만 스벤트의 마리네이드는 순식간에 대히트를 치고, 그 뒤로 푸줏간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사고'로 몰래 죽어나갑니다. 한편, 그 때까지 코마 상태에 빠져 있던 비야른의 쌍둥이 형제 아이길이 깨어나 마을로 찾아오고요.

시놉시스만 읽어본다면 [정육점의 비밀]은 식인이라는 주제를 참 모범적으로 해석한 작품처럼 보입니다. 식인이라는 소재와 코미디를 결합하는 담담한 블랙 유머의 스타일도 전형적이고요.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작가인 안더스 토마스 옌센은 이 모범적인 이야기에 자기만의 조용한 향취를 담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과장된 잔혹극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살인장면은 거의 보여지지 않고 가끔 나오는 손상된 인간 시체들을 제외하면 혐오스러운 장면들도 없죠.

영화는 대신 캐릭터들에 집중합니다. 언제나 인기없고 따돌림 당하는 편이었던 스벤트가 자신을 외면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무덤덤하게 고깃감으로 취급하고 바로 그 사람고기를 통해 동네 인기인이 되는 과정은 분명 생각해 볼만한 아이러니입니다. 살인이라는 폭력적인 범죄가 푸줏간업이라는 생산적인 직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 과정의 묘사 역시 기계적인 아이러니로 보기엔 상당히 미묘하지요.

스벤트가 비교적 단순한 동화적 인물이라면 비야른은 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가족과 아내를 잃은 뒤로 죽음과 시체에 집착하게 되는 이 우울한 남자의 이야기는 평면적인 도덕적 우화가 될 수도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에 어떤 시적인 뉘앙스를 첨가합니다. 비야른과 아이길의 이야기에서 죽음과 시체, 살인, 식인은 더이상 역겨운 대상이 아닙니다. 어떨 때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죽은 아내의 고기를 먹고 살아남았던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요.

많은 관객들은 [정육점의 비밀]을 [델리카트슨]과 비교합니다. 우리나라 관객들은 [조용한 가족]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분명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독창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에 나온 유사 소재의 영화들과 기계적인 비교 대상이 될만한 작품도 아니에요. 적어도 [정육점의 비밀]은 북구영화 특유의 차갑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통해 식인이라는 소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꾸려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미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마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인지 모르죠. 어떨 땐 고기보다 양념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고요. (04/06/29)

★★★

기타등등

그래도 그 동네 사람들이 닭고기와 사람고기를 구별하지 못했다는 건 믿기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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