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6)

2010.01.31 22:38

DJUNA 조회 수:5220

감독: 송해성 출연: 이나영, 강동원, 윤여정, 강신일, 정영숙, 김지영, 장현성, 최명수, 김세동, 정인기 다른 제목: Maundy Thursday

저에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레고 블럭 교도소 세트처럼 보입니다. 보기에 좋을 수도 있고 그 자체의 가치도 있을 수는 있으며 만든 사람들은 당연히 흐뭇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기성품이에요.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재료들은 소위 '사형수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영화(또는 원작소설)는 그것들을 할인점에서 사들여 재조립한 것에 불과해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관념적이라고 해도 괜찮겠어요. 영화의 기반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몇몇 추상적 개념들로 구성된 구조물이고 이야기는 순전히 그들에 살을 붙이기 위해 도입되었어요. 그 때문에 계급문제나 사형제도와 같은 현실 세계의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영화는 허공 중에 붕 떠 있습니다.

그 결과 발생한 건 턱없이 빈약한 세부묘사입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살인장면은 묘사가 너무 엉망이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뒤에 진행된 수사 과정은 묘사되지 않지만 그 결과만 봐도 뭔가 굉장히 이상해요. 범죄자들이나 수사관 모두 DNA나 지문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같으니 말입니다. 교도소 묘사 역시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영화 속의 교도소가 실제 세계의 교도소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거든요. 추리물이 아니니 건성으로 넘어가도 된다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당위성은 있어야죠.

주인공들을 둘러싼 설정 역시 저에겐 굉장히 약하게 느껴집니다. 둘 다 모두 기성품이지요. 사형수 윤수의 과거 이야기는 잘만 다룬다면 [반딧불의 묘]처럼 사람 가슴을 찢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냥 이런 '장르'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재료를 하나 뽑아 끼워넣은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유정의 과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지독하게 피상적이에요. 가톨릭교에 대한 묘사 역시 실망스러운데, 그건 아마 제가 이 종교를 다루는 예술작품들에게서 늘 일정 수준 이상의 깊이를 요구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일 테니 지나치게 매달리지는 않겠습니다.

남은 것은 거의 추상적인 연민입니다. 사형수 윤수나 자살 버릇이 있는 왕년의 가수 겸 미대 강사인 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민을 목적으로 창조되었죠. 그건 극도의 자기연민을 표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거의 완벽한 연민을 쏟아붓기 위해 조작된 타자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연민이라는 감정 자체인 겁니다.

원작 팬들이 뭐라고 불평하건, 그 때문에 이나영과 강동원이라는 캐스팅은 영화에서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설정과 목적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이들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일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촌동네 총각 분위기가 나는 강동원보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사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나영 쪽이 이 영화에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강동원은 이나영과 이미지가 맞는 거울상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윤수가 유정을 '누나'라고 부르는 부분은 썩 그럴싸합니다.

원작소설의 팬들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엔 굳이 책을 들어 확인할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 말이죠. 저에겐 어땠냐고요? 그냥 요새 유행하는 드라마타이즈 뮤직 비디오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쁜 배우들이 감상적인 배경 음악 속에서 관습적인 멜로 연기를 하는 영상물 말이죠. 물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런 비디오보다는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영화에서 만족하며 봤던 건 결국 예쁜 배우들의 예쁜 연기였던 것 같군요. 특히 이나영요. 병원에서 엄마한테 생지랄하는 이나영, 교통 법규 위반하는 이나영, 그림 그리는 이나영, 아빠 영정 사진 앞에서 큰 절 하는 이나영, 케익 사진 찍는 이나영, 집에 들어와 옷 입은 채로 매트리스 위에 폭 쓰러져 잠드는 이나영, 일방 거울 뒤에서 흐느끼는 이나영... (06/09/06)

★★☆

기타등등

기자간담회에서 담당자들이 결말을 노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6) [1] file DJUNA 2010.01.31 522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