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빌리아의 토끼 Rabbit of Seville (1950)

2010.02.05 23:29

DJUNA 조회 수:3138

감독: Chuck Jones 출연: Mel Blanc, Arthur Q. Bryan

(스포일러가 있어요.)

듀나 [세빌리아의 토끼]는 [왓츠 오페라, 닥?]보다 7년 일찍 발표된 작품이지만 비슷한 스타일과 소재의 후속작보다는 덜 알려진 편입니다. 그러면서도 언급될 때마다 [왓츠 오페라, 닥?]과 비교되니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오페라라는 소재를 다룬 걸 빼면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의 다른 작품들이니까요.

파프리카 이 영화에 대한 선호도도 조금씩은 [왓츠 오페라, 닥?]과 연결되지요? 많은 사람들은 [왓츠 오페라, 닥?]과 이 영화를 비교하며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걸 입증하려 합니다. 반대로 [왓츠 오페라, 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다 유머가 풍부하고 농담이 많은 [세빌리아의 토끼]를 비교용으로 제시하지요.

듀나 적어도 하나는 확실합니다. [세빌리아의 토끼]에는 [왓츠 오페라, 닥?]의 모험정신이 부족해요. 이 영화는 거의 장르화된 클래식 카툰입니다. 클래식 음악에 맞추어 우스꽝스러운 액션을 벌이는 코미디지요.

영화는 거의 규격화된 도입부로 출발합니다. 할리우드 볼에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공연되기 직전에 엘머 퍼드와 벅스 버니가 무대 뒤로 뛰어듭니다. 총을 든 엘머가 벅스 버니를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벅스 버니가 막을 올리고 그 즉시 벅스 버니식으로 개작된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시작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와 [왓츠 오페라, 닥?]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처음부터 오페라 만화가 되는 데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거든요. 그보다는 칼 스탈링이 그럴싸하게 편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에 맞춘 코믹 뮤직 비디오라고 할 수 있어요. 벅스 버니가 처음에 아리아를 부르긴 하지만 그것도 서곡의 도입부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파프리카 스탈링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완벽하게 작업을 하긴 했지만 워낙 하나의 오페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절충주의적 스타일이 조금 죽는 것 같습니다. 하긴 여기서 중요한 건 로시니니까 스탈링의 개성이 꼭 드러나야 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요.

많은 벅스 버니 영화에서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벅스 버니와 엘머 퍼드의 파워 게임입니다. 엘머 퍼드는 사냥총으로 벅스 버니를 제압하려 하지만 언제나처럼 벅스 버니의 마술과도 같은 술책에 말려들고 말지요.

[세빌리아의 토끼]에서 재미있는 건 벅스 버니가 휘두르는 책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성적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번에도 벅스 버니는 여장을 하고 엘머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발소 무대에서 벅스 버니가 엘머에게 가하는 가혹행위들은 은근히 야하고 변태스럽습니다. 결정적으로 벅스 버니에게 말려든 엘머는 끝에 벅스 버니와 결혼까지 합니다!

듀나 엘머가 중반 이후 거의 반쯤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여서 그런 느낌이 더 들 거예요. 벅스 버니는 엘머를 거의 섹스 토이처럼 가지고 놀고 있지요. 구체적인 성행위 묘사나 직접적인 암시는 없지만 이 불량 토끼는 영화 내내 엘머를 정신적으로 겁탈하고 있습니다.

[세빌리아의 토끼]의 동성애적 느낌은 [왓츠 오페라, 닥?]보다 훨씬 강합니다. [왓츠 오페라, 닥?]은 그래도 이성애적인 성역할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역할은 옷갈아입는 것처럼 쉽게 바뀝니다. 벅스 버니는 초반부의 아리아 장면에서 여성 역할을 하지만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는 신랑 역을 하지요. 초반부에 벅스 버니의 세뇨리타에 홀딱 빠져 있던 엘머도 벅스 버니의 선물 공세를 받자 자연스럽게 여성처럼 대응하고요. 그리고 중반에 벅스 버니가 회전문에서 빠져 나온 엘머와 왈츠를 출 때는 둘 다 남자입니다. 이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고정된 성역할이 아니라 힘을 쥔 자가 어떤 방식으로 그 힘을 사용하느냐입니다.

파프리카 엘머는 마치 우연히 도시 게이 바에 휩쓸려간 시골 소년처럼 행동하고 있었지요. 반대로 벅스 버니는 닳을대로 닳은 도회지 게이 남자처럼 굴고 있었고요.

듀나 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둘의 역학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벅스 버니 위주입니다. 엘머가 너무나도 소극적이기 때문에 중반은 긴장감이 좀 떨어져요.

파프리카 아마 이발소라는 설정 때문에 그럴 거예요. 이발소에서 손님은 하는 일이 없지요. 모든 전권은 무시무시한 칼과 가위를 휘둘러대는 이발사에게 있습니다.

전 그 장면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맞아요. 결투의 긴장감은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벅스 버니의 장난은 흥미진진하고 거의 최면 상태에 빠진 엘머를 가지고 벌이는 벅스 버니의 게임에는 킹키한 재미가 가득한 걸요. 이발소의 소도구를 활용한 엘머와 벅스 버니의 전쟁도 잘 짜여져 있고요.

그리고 벅스 버니와 엘머 퍼드의 이런 역학관계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원작과 일치합니다. 원작의 바르톨로도 이 영화의 엘머처럼 완전히 피가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잖아요. 끝에 가서 '피가로의 결혼'으로 끝나는 것도...

듀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결혼하는 건 피가로가 아니라 알마비바 백작입니다.

파프리카 누가 모르나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원작엔 이발소도 나오지 않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구체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적당한 인용과 흐름으로 농담을 끌어내는 것이잖아요. 하여간 여러 면에서 [세빌리아의 토끼]는 번쩍 번쩍 빛이 납니다. 원초적인 슬랩스틱과 은밀한 성적 농담이 서구적 교양과 근사하게 결합한 작품이지요. (03/05/27)

★★★☆ 

기타등등

1. 이 영화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원래 출연자들은 Eduardo Selzeri, Michele Maltese and Carlo Jonzi입니다. 제작자 Edward Selzer, 각본가 Michael Maltese, 감독 Charles M. Jones의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고친 거죠.

2. 벅스 버니가 피아노 음악에 맞추어 엘머의 머리를 마사지하는 장면을 자세히보세요. 그 장면만 손가락이 다섯 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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