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마적 (1968)

2010.03.06 18:35

DJUNA 조회 수:3076

감독: 최경옥 출연: Li Li-hua, 신영균, 최불암, 정민 다른 제목: Female Bandits

(스포일러 천지입니다.)

보통 만주활극에서 마적은 미국 원주민처럼 얼굴없는 악당이죠. 하지만 후기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원주민들의 입장을 반영하려 노력한 것처럼, [여마적]에서도 마적에 대해 어느 정도 교정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마적은 도적떼가 아니라 일본군의 압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든 평범한 농민들이에요. 잘 다루었다면 흥미로웠을 텐데... 시대의 한계가 영화를 망쳐버리는군요.

하여간, 영화의 주인공은 이려화가 연기하는 대학생 아란입니다. 한국영화에 왜 이려화가 나오나고요? 68년작이니까 이려화가 한국영화에 출연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때입니다. 신필림이 한참 쇼 브라더스와 합작영화를 만들 때거든요. 신상옥이 제작한 영화에 이 사람이 나오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거죠. 중국 캐릭터로 나오고 성우 더빙이 깔리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어쨌건, 아란은 방학을 맞아 북경에서 고향 만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가던 길에 검문하던 일본군에게 '신체검사'를 당할 판인데, 갑자기 뱃살 두둑한 덩치 큰 조선인 남자가 마차 뒤에서 나와 일본군을 몽땅 쏴죽이죠. 남자 주인공 신영균 등장입니다. 고마워하는 것도 잠시, 신영균은 중간에 아란을 벌판 한가운데 버려두고 자기만 말을 타고 가버립니다. 그러면서 멋있는 척 껄껄거리는 게 얼마나 재수없는지. 아란은 짐을 챙겨들고 집까지 가는 동안 거의 얼어죽을 뻔한답니다.

아란은 간신히 고향 동네 태고촌에 돌아옵니다. 이곳은 마적단의 아지트로 아란의 아빠는 여기 두목이에요. 아란은 교육받은 신여성답게 마적단 무리들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지만 이게 영 먹히질 않죠. 게다가 아빠가 죽으면 아란은 언젠가 저 무식하고 험악한 남자들 중 한 명과 결혼해야 할 판이죠. 아란의 남편이 된 남자는 차기 마적단 두목이 되고요. 남자들이 다들 아란에게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최불암이 연기하는 부두목 노철이 그래요. 하지만 아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으니... 이 사람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신영균이 다시 나타납니다. 알고 봤더니 이놈이 독립군 대장이에요. 다시 만난 아란에게 미안하다는 기색 없이 낄낄거리는 놈의 얼굴을 보니 정말 한 대 패주고 싶습니다. 녀석은 일본군에게 습격당하는 한인 마을을 구하기 위해 마적단에게 손을 벌리러 왔는데, 두목 딸을 그렇게 모욕해놓고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게 생겼습니까? 물론 잘 나옵니다. 염치고 뭐고 없는 놈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착하디 착한 마적단 두목은 그의 요청을 들어준답니다.

남자들이 떠난 틈을 타서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합니다. 몇 명은 동굴로 피해 살아남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당하지요. 아란 역시 일본군에게 잡혀 윤간당합니다. 죽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긴 하지만요. 마적단 역시 일본군과 싸우다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일단 두목이 부상으로 죽어가요. 부하들 말을 들으니 신영균은 옆에서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간 모양입니다. 두목은 나름 신영균의 변명을 해주지만 제가 보기엔 부하들이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하여간 대장은 죽고 아란은 잽싸게 두목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적단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으니 영리한 거죠. 슬프게도 아란이 한 똑똑한 짓은 이게 답니다.

자, 그럼 가닥이 잡힙니다. 이 영화는 이제 강간복수극인 거죠. 제가 많이 껄끄러워하는 장르이긴 하지만 가장 껄끄러운 부분인 윤간 장면이 끝났으니 괜찮습니다. 이제 자길 강간한 일본군 세 명을 쏴죽이면 끝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랍니다. 영화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영화는 삼각관계 로맨스가 됩니다. 그것도 가장 불쾌한 종류죠. 마적단 두목이 되어 북만주를 누비던 아란은 다시 신영균과 재회합니다. (이 캐릭터의 이름은 끝까지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신영균은 염치도 없이 아란에게 추근거리는데, 그 때 아란의 남자친구가 찾아와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남자친구인 재천이란 녀석이 바로 신영균의 동생이 아니겠습니까? 재천은 어떻게든 아란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가려 하고, 신영균은 그런 동생에게 아란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막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아란과 노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죠. 척 봐도 이 덜 떨어진 놈이 아란을 '오랑캐 매춘부' 취급하고 있는 게 보여요. 둘은 아란을 놓고 싸우는데, 어떻게 하면 조선남자의 찌질함을 대륙에 떨칠 것인지 평생동안 고민한 놈들 같습니다.

아란에게 집적거리던 남자가 또 있었죠? 최불암이 연기한 노철말입니다. 지금까지 신영균을 질투하고 있었던 노철은 결국 두목을 겁탈하려다 신영균에게 걸립니다. (이전에도 그는 마적 한 명이 여자를 겁탈하려는 걸 잡은 적 있죠. 분위기 안 좋은 동네이긴 합니다.) 노철은 홧김에 아란이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죠. 아란은 그 사실을 노철에게 고자질한 여자를 총으로 쏴 죽이고(도대체 왜?) 노철을 추방합니다. 한편 역시 질투심에 몸이 달아있던 재천은 일본군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노철을 만나요. 둘은 술을 퍼마시고... 에헴, 여기서 이야기가 흐릿해집니다. 재천은 자신이 노철에게 넘어가 기밀 정보를 일본군에게 제공해 형을 배반했다고 믿는 모양인데, 정말 그걸 보여주는 장면은 없거든요. 그래도 그렇다면 그냥 믿어줘야죠.

신영균이 이끄는 독립군은 무기를 싣고 가는 일본군 트럭을 습격합니다. 원래는 마적단과 함께 할 생각이었지만 분위기가 말이 아니죠. 그 동안 찌질이 브라더스가 태고촌에서 저지른 일을 생각해보라고요. 물론 그 계획은 거의 실패할 뻔합니다. 이미 노철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마음씨 착한 아란과 마적단이 중간에 끼어들어 간신히 몰살은 면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란은 자길 겁탈한 일본군들을 죽이는 데 성공하죠. 복수 끝, 행복 시작? 아뇨. 정말 짜증나는 결말이 남아있습니다.

이 결말의 원흉은 재천입니다. 양심에 찔린 재천은 공격 직전에 아란을 찾아 돌아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고백합니다. 아란은 재천의 실수를 묻고 독립군을 도와 싸움에서 이기고, 그 뒤에도 계속 같이 북경에 가자고 꼬드기던 재천 역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진 아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로잡힌 노철이 죽기 전에 진짜 배반자가 재천이라고 폭로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찬 신영균은 동생을 처형하려 하고 아란은 동생을 쏘려는 형의 손을 겨누고 총을 쏘지요.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동생은 그런 형을 구하겠다면서 아란을 쏜답니다! 아란은 죽고 죄의식에 못이긴 재천은 아란의 시체 위에서 권총 자살을 합니다.

이게 도대체 뭐랍니까? 도대체 이 놈들이 대륙 땅까지 와서 조선독립을 위해 한 게 뭐가 있어요? 사방에 민폐만 끼치고! 주변 사람들은 몽땅 놈들 때문에 죽고! 성공한 건 하나도 없고! 결정적으로 몽땅 느끼하고 재수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적단은 신영균의 말을 들어 재천을 아란 옆에 묻어주니... 정말 착한 사람들이에요. 제가 마적이었다면 남은 조선 독립군들을 몽땅 모아 총살한 뒤 독수리 밥으로 줬지요. (0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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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영화내내 여자 마적은 아란 한 명밖에 나오지 않으니 [Female Bandits]라는 영어 제목은 그렇게 정확하다고 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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