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1969)

2010.03.06 18:32

DJUNA 조회 수:3377

감독: 남태권 출연: 허장강, 강미애, 이순재, 윤정희, 김석훈 다른 제목: Regret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젊디젊은, 하지만 메이크업을 지나치게 한 티가 나는 이순재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이순재가 연기한 창일은 식물에도 영이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쓰는 중이죠. 창일은 윤정희가 연기한 여자 친구 정주와 함께 불당골이라는 마을에 사는 식물학계의 권위자 고박사를 찾아갑니다. 어떻게 고박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갈 생각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설정상 그의 주소를 알거나 그의 소문을 들을만한 상황이 아니거든요.

고박사네 집은 외딴 산 속에 서 있는 서구식 저택입니다. 분위기가 반은 귀곡 산장이고 반은 해머 영화에 나오는 영국 저택 같죠. 밤늦게 찾아온 창일과 정주는 주인도 못만난 채 나이든 유모의 안내를 받아 침실로 안내됩니다. 하지만 집 안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창밖에 산발한 여자 귀신이 나타나니 잠자리가 편할 리 없죠.

다음날 창일과 정주는 집주인 고박사를 만납니다. 고박사는 가짜 턱수염을 붙인 허장강인데, 이 식물학자라는 양반은 드라큘라처럼 검은 망토를 입고 있고 저택에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지하 실험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실험실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정체불명의 붉은색 꽃이고요. 게다가 고박사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이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정주가 그 집에서 쓴 안부 편지를 집에서 받아 읽은 정주의 아버지가 놀라 이렇게 외치거든요. "뭐라고? 고박사는 5년 전에 죽었는데?"

다시 밤이 되고 창일은 고박사가 왜 그렇게 수상쩍게 구는지 밝히기로 마음먹습니다. 고박사는 실험실에서 옥녀라는 여자를 향해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창일은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있는지 그걸 다 알아 듣습니다. 고박사가 나가자 창일은 몰래 실험실에 숨어들고...

그 때 갑자기 릴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고박사의 회상으로 넘어갑니다. 아마 창일이 고박사의 일기장이나 수기 같은 걸 읽은 게 아닌가 싶군요. 영화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아니면 앞의 릴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릴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죠.

회상 장면에서 고박사는 성에 막 눈을 뜬 십대 소년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을 때 40대 중반이었던 허장강이 여전히 그 '십대 소년'을 연기하고 있죠. 보면 참 쑥스럽습니다. 보기 쑥스럽기는 고박사의 친구인 성호를 연기한 김석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여간 고씨 소년은 같은 동네에 사는 옥녀라는 소녀([월하의 공동묘지]의 강미애가 연기하고 있답니다)를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옥녀는 '돌쌍놈'인 성호를 좋아하고 있지요. 옥녀와 성호가 같이 달아날 계획을 짜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고씨 소년은 옥녀를 속여 묘지 자리로 끌어낸 뒤 겁탈하려 하다 그만 옥녀를 죽이고 맙니다. 구체적인 장면은 없지만 아마 고씨 소년은 옥녀를 근처 동굴에 묻은 것 같습니다. 그 뒤부터 꼭 [뽀뽀뽀] 세트 같은 이 동굴은 옥녀 귀신의 아지트가 되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다들 성호랑 옥녀가 야반도주 했다고 믿는 동안 옥녀의 귀신이 동굴에 나타납니다. 소복을 입고 우는 여자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게 누구요?"라고 묻자 옥녀 귀신이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거든요. 아저씨는 "귀신이다!"라고 고함을 지르며 달아나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도 옥녀가 죽었는지 몰랐고 옥녀 귀신도 특별히 귀신 티를 내고 있지 않았으니, "아니 옥녀야,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라고 묻는 게 정상일텐데요.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고씨 소년은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한참 나이가 든 뒤에 아름다운 (...은 각본에 나와 있는 표현이고 사실은 60년대 한국식으로 푸짐한 아줌마인) 아내 수미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옵니다. 저택에서는 충실한 유모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때의 시대배경은 60년대임이 분명합니다. 60년대 초거나 중엽이겠지요. 수미는 60년대식 옷을 입고있고 고박사도 꽤 나이가 들어 보이니까요.

어느 날 수미는 산책을 나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걱정이 된 고박사는 아내를 찾아 나섰다가 그만 [뽀뽀뽀] 동굴로 들어옵니다. 그는 보이스 오버로 '왜 내가 이 동굴로 들어왔을까?'하고 궁금해합니다. 제 생각에 이 독백은 나중에 추가된 것 같습니다. 편집하다보니 이유도 없이 갑자기 동굴로 들어간 게 영 어색했던 모양이죠. 동굴에서 수미를 만난 고박사는 아내의 손을 잡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아내는 사라지고 없고 그가 들고 있던 건 잘린 마네킹 손이 아니겠습니까! 아악!! :->

다행히도 아내는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심은 잠깐. 밤이 되자 얼굴 한쪽에 햄버거를 붙이고 한국 처녀 귀신의 전매 특허인 깔깔 웃음을 흘리는 옥녀의 유령이 나타난 거예요. 여기 괜찮은 극적 전환이 있습니다. 얼굴의 햄버거가 붙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동안 옥녀는 고박사를 괴롭히는 대신 유혹합니다. 그의 사랑에 감동했다나요?

옥녀와 함께 한밤중에 밖으로 나간 고박사는 다음 날 아침 이상한 붉은 꽃을 발견해서 가지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꽃은 옥녀가 환생한 것이었어요. 낮에는 꽃모양을 하고 있는 옥녀는 밤에는 처녀 귀신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꽃은 늘 피에 굶주려 있군요. 고박사는 무덤에서 파온 여자 시체에서 피를 뽑아 주지만 옥녀 꽃은 살아있는 몸에서 나온 피만 좋아합니다. 결국 고박사는 한밤중에 동네 골목으로 나가 마지 심슨 헤어스타일을 한 젊은 여자를 잡아와 피를 뽑습니다. 처녀귀신 원한 풀기 영화가 갑자기 해머 뱀파이어 영화가 되는 순간이죠. 아까 고박사의 검은 망토 이야기를 했죠? 이 영화에서 허장강은 노골적으로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큘라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 다음 시퀀스가 멋집니다. 고박사는 무슨 클럽인가에서 빨간 옷을 입고 야한 춤을 추는 댄서를 눈여겨 봅니다. 고박사와 눈이 맞은 댄서는 같이 밖으로 나오죠. 다음 장면에서 고박사는 이두마차(!)를 타고 비포장 시골길을 질주합니다. 갑자기 마차 문이 열리고 눈이 활짝 뜨여진 댄서의 상반신이 튀어나옵니다! 죽었냐고요? 아뇨, 그럴 수는 없죠. 옥녀는 산 사람 피만 마시니까. 마차 장면에서 분명 죽은 척하고 있던 댄서는 다음에 이어지는 지하실 장면에선 멀쩡하게 살아 신음한답니다.

지금까지 전 수미가 죽었거나 가출이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 아내 이야기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수미는 남편이 사람을 죽이고 뱀파이어 꽃과 바람이 난 동안에도 여전히 저택 안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옥녀는 이제 수미를 질투하며 수미의 피를 마시고 싶어합니다. 수미 것이 정 안된다면 고박사 피도 나쁠 게 없고요. 어느 날 수미는 옥녀의 유령을 보고 놀라 계단에서 넘어지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박사가 아내 침실에서 뭔가를 가지고 내려오는 데 그게 아내의 피인 건지요. 하여간 수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고박사는 이제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아내 수미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고박사의 몸은 이미 변해 있습니다. 그는 밤마다 밖에 나가 여자들을 죽입니다. 죽여서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옥녀는 고박사의 몸이 변했다고만 말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정보를 주지 않고 있거든요. 고박사는 미치겠습니다. 자기를 조종하는 옥녀꽃을 아무리 뽑아 버려도 다음날이면 돌아와 있거든요.

드디어 사람들도 연쇄살인범이 날뛴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경찰들이 수사에 나서고 신문에서는 기사를 써대죠. 그런데 빙글빙글 돌면서 나오는 기사들이 모두 일본어입니다! 일본에서만 이 살인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아직도 작가와 감독은 지금이 일제 시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걸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창일과 정주가 고박사네 집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고박사는 정주가 옥녀의 환생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왜? 둘이 닮았으니까요! 보조개도 닮고 웃는 모습도 닮고. 꽃이 된 옥녀는 어떻게 하고? 아직 영화는 그 논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주가 왜 옥녀를 닮았는지 아세요? 여기엔 정말 초월적인 유전학의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브로셔에 따르면 정주의 아빠가 바로 옥녀의 옛 남자친구 성호라는군요. 전 눈치 못챘습니다. 이 브로셔의 정보가 맞는지도 확인 못했고요. 하여간 이 정보가 맞다면 정주가 옥녀를 닮은 건 잠자리를 같이 한 적도 없었던 남자친구가 나중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가진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고박사는 정주네 방으로 들어옵니다. 정주를 기절시켜 납치한 고박사는 정주의 피를 옥녀 꽃에 먹이려고 지하실로 들어옵니다. 아까는 정주가 옥녀의 환생이라면서요? 저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마시길.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고박사를 말리다 유모는 그만 계단에서 떨어지고 고박사와 창일은 싸우고 창일과 깨어난 정주가 저택을 떠나 달아나고... 뭐, 여러가지 액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진짜 확 깨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상당한 유모가 질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늘 기도를 하던 '신령님' 그림을 들고나와 지하실로 내려가요. 그리고 옥녀 꽃에 신령님 그림을 들이댑니다. 그러자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림하고 비슷하게 생긴 신령님이 나타나 옥녀에게 칼질을 해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보다 정통적인 뱀파이어 영화에 이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뱀파이어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면 거기서 뱀파이어 킬러 예수 그리스도가 튀어나와 뱀파이어를 상대로 와이어 액션을 펼치는 거예요.

드디어 옥녀가 신령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고박사는 옥녀한테서 해방되지만 결국 동굴에서 죽고 맙니다. 창일과 정주는 천처럼 펄럭거리며(!) 무너지는 동굴에서 탈출하지요.

다음날 아침, 정주의 아빠가 불당골에 도착합니다. 이 아빠가 정말 성호라면 젊은 시절을 보낸 마을이 낯설지가 않을텐데, 이 영화에서는 길도 모르는 모양이군요.

정주 아빠가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저택에 도착하는 동안 창일과 정주는 깨어납니다. 저택은 이미 폐가가 되었고 그들도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입은 옷차림 그대로군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꿈일까요? 설마요. 그렇다면 어떻게 정주가 아빠에게 편지를 보냈겠어요? 그럼 창일과 정주는 잠시 5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것일까요? 역시 편지가 설명이 안되는군요. 그렇다면 혹시 지금의 창일과 정주가 유령이고 진짜 창일과 정주는 5년 전의 시간대에 빠져서 죽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0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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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강미애는 경력 말기에 호러 영화들이 꽤 많군요. 다른 나라에서라면 호러 퀸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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