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2020)

2020.06.05 00:11

DJUNA 조회 수:3925


제 기억이 맞다면 박상현의 [결백]은 팬데믹으로 시사회가 밀렸던 첫 번째 한국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밀린 게 아니라 두 번이나 밀렸죠. 지금 개봉하는 게 맞을까요. [콜]처럼 하반기로 옮기는 게 맞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법정물입니다. 충청남도에 있는 시골 농가의 장례식장에서 독극물이 든 막걸리를 마신 마을 주민 한 명이 죽고 4명이 중태에 빠집니다. 그 중엔 충청남도 도지사를 노리고 있는 대천시 시장인 추인회도 포함되어 있고요. 남편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던 화자가 체포되고, 한 동안 가족과 인연을 끊고 있었던 딸 정인이 내려옵니다. 서울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인 정인은 직접 엄마의 변호를 맡고 사건을 수사하는데, 당연히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무언가는 익숙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수많은 작은 마을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진부한 추악함이에요. 법과 도덕을 넘어선 중장년남자들의 카르텔이 음모를 꾸미고 있고 당연히 부동산이 엮여 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용의자가 있는 간단한 사건이라 다들 쉬쉬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젊은 여자가 내려와 마을을 뒤집고 있으니 다들 기분이 나쁩니다.

여기서 기분이 나쁜 건 정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인은 아버지의 구박을 받고 자란 장녀로, 부모 도움 없이 혼자 서울로 올라가 출세한 변호사입니다. 마을에 대한 기억이 좋을 리가 없고 이건 그냥 정당화된다고 봐야겠습니다. 정인은 그렇지 않아도 그리 성격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사건을 맡으면서 그 정도가 더 심해졌고, 영화 내내 늘 다양한 강도의 짜증을 흘리고 다닙니다.

정인은 머리가 좋고 유능한 전문가이고, 이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정인은 극적 설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영리하게 굴고, 영화는 정인을 중심으로 늘 바쁘게 움직입니다. 아쉽게도 영화가 다루는 사건은 정인의 능력을 살리기엔 좀 단순한 편이고, 사건의 진상(들)도 비교적 쉽게 밝혀집니다. 정인이 그 사실을 바탕으로 낸 해결책 역시 조금 더 교활한 면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 자체는 캐릭터와 맞아요. 전 좀 더 과격하게 나갔어도 재미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생각은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하고 있었겠지만 굳이 선을 넘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겠지요.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상당한 강도의 K 멜로드라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취향이라고는 말을 못하겠어요. 하지만 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이 영화 속 세계가 너무나 한국적인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예측가능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멜로드라마를 거쳐도 정인의 캐릭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승리를 위해 이를 동력으로 삼아 이용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배종옥의 열연이 후반의 멜로드라마를 끌어가지만, [결백]은 신혜선의 영화입니다. 전 이 사람이 명탐정 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특성이 이 영화에서 아주 잘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신혜선은 이 인물을 머리가 아주 수월하게 돌아가는 사람으로 연기하고 있어요. 관습적인 '냉철한' 연기 없이 똑똑해 보이고, 딕션은 좋지만 대사는 힘주지 않고 가볍게 처리하고. 무엇보다 굳이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나 이해에 매달릴 생각을 안하는 싸가지 없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20/06/05)

★★★

기타등등
운전 중 휴대폰 통화를 하지 맙시다. 아무리 영화 주인공이라고 해도.


감독: 박상현, 배우: 신혜선, 배종옥, 허준호, 홍경, 태항호, 고창석, 박철민, 다른 제목: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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