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들어도 일본 영화인 걸 알겠다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어요. 이 영화의 감독은 존 케이언즈라는 미국인 남자입니다. 10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거기서 영화를 공부하고 그랬다는군요. [세라복 묵시록]은 그의 첫 장편영화입니다. 작년 NAFF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고 올해 부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지요.


영화의 도입부는 교복 입은 일본 여자아이들에 대한 페티시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주인공 사쿠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고등학생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변의 남자들이 귀에 피를 흘리며 좀비가 됩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사쿠라는 활과 영어교과서를 챙겨들고 집에서 달아나지요. 여러분은 사쿠라가 만화책에 나올 법한 여전사가 되어 활로 좀비들을 한 명씩 처치하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고 정말 그런 장면들이 뒤에 나옵니다.


하지만 영화의 진행방향은 기대와 조금 다릅니다. 케이언즈는 교복 입은 여자아이가 좀비들을 학살하는 그림 자체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영화는 이를 바탕으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조금만 주의깊게 봐도 영화가 내세우는 차별점이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가 되는 건 모두 남자들이에요. 맞서 싸우거나 희생자가 되는 건 모두 여자들이고요. 라쿠나 셀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이 떠오르죠? 중간부터는 엉뚱한 설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사쿠라는 눈먼 중년여인과 함께 어떤 인물을 바다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는데, 그 인물은 사쿠라의 영어교과서에 나오는 캐릭터 빌리와 똑같이 생긴 서구인 소년입니다.


수많은 정치적 함의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물론 존 케이언즈의 국적과 인종과 성을 필터로 삼아 이들을 다시 재해석하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케이언즈도 가만히 서서 분석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건 그도 이미 다 인식하고 있단 말이죠. 그만큼 노골적인 재료니까요.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영화는 조금 깨져 있습니다. 정치적 은유가 너무 강하고 많다보니 그게 좀비 액션 영화의 스토리를 갉아먹는 거죠.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일종의 인문학적 퍼즐로 읽었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는 동안 장르적 재미가 상당히 날아가버리고요. 그럼 곤란하죠. 좀비와 활을 든 세일러 교복 차림의 여자애가 한 영화에 같이 나온다면 의무적으로 채워야 할 액션 분량이 있지 않습니까. 이 영화는 그게 기대만큼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 영화에는 여전히 모범생스러운 재미가 있습니다. 성실한 외국인 학생이 일본 대중 문화의 재료를 꼼꼼하게 공부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것 같달까요. 그리고 영화 전체를 통해 천천히 흐르는 차가운 암울함은 상당한 힘을 발휘합니다. 세일러복을 입은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세워놓고 그 아이를 작정하고 착취하는 대신 제대로 된 캐릭터 대접을 해주는 것도 잘했다고 생각하고요. 감독 말에 따르면 그건 프로듀서의 입김 때문이라지만. (11/07/21)


★★☆


기타등등

다시 생각해보니 은근히 이토 준지스러운 영화이기도 했어요.

 

감독: John Cairns, 출연: Rino Higa, Asami Miyakawa, Mai Tsujimoto, Kaoru Nishida, 다른 제목: Schoolgirl Apocalypse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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