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가 나왔을 때만 해도,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사실적인 미국 배경의 햄릿으로 만들려는 진지한 의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영화가 나왔지만, 이 시리즈가 얼마나 거창한 괴물인지 보여준 건 [다크 나이트]가 나온 뒤부터였습니다. 가면 쓴 자경단원이 나오는 만화의 소재가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결합된 거대한 대작으로 만들어졌던 거죠. 이런 이야기를 캠피한 농담 한 마디 없이 진지하게 해댔으니, 그 자체가 엄청난 농담이어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현기증이 나는 거죠.

놀런의 베트맨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이지즈)]는 [다크 나이트]의 직접적인 속편이기도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배트맨 비긴즈]와는 확연히 다른 [다크 나이트]의 어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열어두었던 이야기를 봉합하고 있지요. 이 작품으로 놀런의 [배트맨] 시리즈는 완벽한 서클을 그리며 완성됩니다. 

영화는 하비 덴트 법으로 조직범죄자들을 모두 감옥 안에 집어 넣고 오래간만에 평화를 유지하는 고담시의 모습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짐 고든은 배트맨에게 누명을 씌우고 덴트를 가짜 우상으로 만든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고 있고, 브루스 웨인은 19세기 통속극에 나오는 괴짜 주인공처럼 웨인 저택에 은둔하고 있습니다. 물론 배트맨은 사라진지 오래.

이 때 새로운 악당 베인이 등장합니다. 마스크를 쓴 거한인 그는 브루스 웨인이 클린 에너지 개발을 위해 만든 핵융합로를 강탈해 핵폭탄으로 만들고 고담시를 고립시킨 뒤 무정부주의적인 난장판으로 만듭니다. 그러는 동안 오래간만에 다시 나타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추락을 경험합니다. 

영화는 대서사극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대서사극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거대한 역사의 현장 안에서 역사와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보고 있으면 프랑스 혁명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놀런은 정말로 영화 내내 프랑스 혁명의 패러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스티유 함락, 혁명재판소 다 나오죠.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 영화의 각본을 쓰는 동안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많은 걸 빌어왔다고 하더군요. 듣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배트맨의 비중이 작았던 놀런의 삼부작 중 배트맨이 가장 조금 나오는 작품입니다. 심지어 브루스 웨인도 이전보다는 조금 나옵니다. 여전히 그는 가면 쓴 영웅이니 여러 멋진 일들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베인이 만드는 역사의 일부일 뿐입니다. 고든 국장, 고아원 출신의 제복 경찰 존 블레이크, 보석 도둑 셀리나 카일, 웨인 그룹의 루시어스 폭스와 같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막판의 액션 장면에서 이들은 [레 미제라블]의 바리케이트 사람들처럼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다크 나이트]에서 이어집니다. '어떻게 카오스와 싸울 것인가.' 베인은 일종의 종말론적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조커보다 한 수 더 뜨는 상대죠. 그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심판자입니다. 단지 그의 심판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를 그대로 방치해두면 고담시는 방사능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베인이 고담을 어떻게 보건,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불완전하고 더럽고 추악한 세계를 일단 살리고 봐야 합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문제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현실 정치의 직접적인 비유로 보면 조금 괴상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고담시 묘사를 월 스트리트 점거 시위와 비교합니다. 정말 닮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거의 50년대 반공영화처럼 읽힐 것입니다. 게다가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의 꼭대기에 있는 억만장자가 아닌가요. 하지만 고담시에 평화를 가져온 하비 덴트 법을 부시 주니어의 애국법과 비교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이러면 또 입장이 꼬입니다. 토론의 시작이 보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직유로 고담시의 난장판을 설명하는 것은 그냥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빠릅니다. 한 4시간 정도여야 할 영화를 170분 안에 쑤셔넣으려고 발악한 흔적이 보입니다. 영화 한 편에 담기엔 이야기가 너무 많고 나오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요. 종종 시간을 줄이려 거의 편법에 가까운 편집을 동원한 부분들도 보입니다. 근데 그 압축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 제임스 엘로이의 짧은 문장처럼 하나의 스타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크 나이트]를 보신 분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단지 그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조금 더 심합니다. 

영화는 [다크 나이트]보다 더 나은가? 전 영화적 완성도만 생각하면 [다크 나이트]가 조금 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독립적인 장편으로서가 아니라 삼부작을 마무리짓는 세 번째 챕터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묶어 본 하나의 영화는 여전히 굉장한 작품이죠. 이 영화만 따진다면 예상 못한 방식으로 시작한 거대한 드라마에 걸맞는 장엄한 결말이고요.  (12/07/18) 

★★★☆

기타등등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배트맨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그렇게 적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베인 일당들이 굴리는 차를 보고 '저것들은 배트맨이 타고 다니던 텀블러를 닮았는데?'라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감독: Christopher Nolan, 출연: Christian Bale, Tom Hardy, Joseph Gordon-Levitt, Anne Hathaway, Gary Oldman, Morgan Freeman, Marion Cotillard, Michael Caine, Juno Temple, Matthew Modine

IMDb http://www.imdb.com/title/tt134583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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