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펜터는 인류종말을 다룬 코스믹 호러 영화를 세 편 만들었어요. [괴물],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 [매드니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존 카펜터의 종말 3부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괴물]은 걸작이고, [매드니스]도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단지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의 평은 엇갈려요. 오늘 다시 봤는데 (제대로 된 화면비율로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좋아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닌데.

영화의 이야기는 LA 변두리의 낡은 성당 밑 지하실에 갇혀 있던 악마가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고, 그 성당의 신부가 일단의 과학자들과 함께 이를 막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설정이 설명돼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기독교 이야기는 몽땅 조작되었고, 그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사실 코스믹 호러 단골 외계 존재들의 투쟁이었던 거죠. 그러는 동안 1999년의 미래에서 어떤 과학자가 타키온을 이용해 보낸 메시지가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오고, 깨어난 악령이 성당 안 사람들을 살해하고 조종합니다.

기독교를 진지하게 다루는 걸 제외하면 무지 러브크래프트적 서사입니다. 초자연현상을 다룬 전통적인 호러처럼 보이는데 이게 SF적으로 설명되는 거죠. 그리고 그만큼이나 나이젤 닐스러운 서사이기도 해요. 카펜터는 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모양이고 여기저기에 오마주를 심어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카펜터의 각본가 필명은 마틴 쿼터매스인데, 당연히 닐의 유명한 시리즈 주인공인 쿼터매스 교수의 이름을 따온 거죠.

단지 카펜터는 닐만큼 잘 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 악마를 코스믹 호러적인 SF로 해석하려는 건 해볼만한데, 이런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풀만큼 존 카펜터의 과학지식이 풍부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과학자들이 나누는 대사는 표면적인 대중과학의 지식을 가볍게 긁어 만든 것들로 별로 먹히지 않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이라면 옛날 과학이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1987년은 그렇게 옛날도 아니거든요. 게다가 다들 말이 어쩜 그렇게 많은지. 과학자로 분장한 할리우드 배우가 슈뢰딩어의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면 안 먹히는 건 자연법칙이지 않습니까.

악령이 깨어나면서 벌어지는 호러 액션은 낫습니다. 고립된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분노의 13번가] 생각도 좀 나요. 중간중간에 나오는 재래식 특수효과도 인상적이고요. 단지 캐릭터들이 너무 많아 집중이 어렵고 전체적으로 산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스믹 호러 안티 크리스트가 이렇게 올망졸망 귀엽게 놀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인간들 기준에서 보니까 무섭지, 설정을 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매우 카펜터스러운 영화인데, 조금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인 것 같습니다. 대사 작업에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만들어도 헛소리일 수밖에 없지만 헛소리처럼 들리는 헛소리와 그럴싸하게 들리는 헛소리의 차이는 크니까요. (20/08/23)

★★☆

기타등등
1. 80년대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동양인 캐릭터의 비중이 큽니다. 스테레오타이프도 아니고요. 이들 중 빅터 웡과 데니스 던은 카펜터의 전작인 [빅 트러블 인 리틀 차이나]에 나왔습니다.

2. 역병이 돌고 광신도가 미쳐 날뛰면서 인류가 멸망하는 게 1999년인 줄 알았던 시절의 작품입니다.


감독: John Carpenter, 배우: Donald Pleasence, Victor Wong, Jameson Parker, Lisa Blount, Dennis Dun, Susan Blanchard, Anne Howard, Ann Yen, Ken Wright, Dirk Blocker, Jessie Lawrence Ferguson, Peter Jason, Robert Grasmere, Thom Bray, Alice Coop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93777/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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