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라는 작품을 패러디 제목으로 먼저 접했어요. 헨리 슬래서의 추리소설 [회색 플란넬의 수의]요. 당연히 그 소설을 읽을 때는 이게 패러디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레너드 말틴의 책을 읽고 이런 제목의 영화와 그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슬론 윌슨의 책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버나드 허먼이 음악을 맡았다니 챙겨보고 싶었어요.

영화의 주인공은 톰 래드라는 사람이에요. 코네티컷에서 살고 결혼했고 애가 셋이에요. 뉴욕에 있는 자선재단에서 일하는데, 아무래도 돈이 좀 부족하고요. 할머니가 유산을 남겨주면 사정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고요. 그래서 봉급을 조금 더 준다는 UBC라는 방송국으로 직장을 옮기려 하는데 직속 상사가 영 자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보스는 대중의 정신 건강을 지원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톰은 그 일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데, 할머니의 하인이 유산을 갈취하려 수를 쓰기도 하고, 반항적인 보스의 딸이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됩니다.

조금 더 드라마틱한 일도 있긴 합니다.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1950년대 초. 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죠. 최전방에서 온갖 일들을 겪었으니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통속적인 사연도 있으니, 이탈리아에 있을 때 이 인간이 그 지방 여자와 바람을 피웠어요. 여자는 임신했고 톰도 그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이 인간은 자기에게 이탈리아인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재수가 없어요.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50년대 영화예요. 그레고리 펙, 제니퍼 존스, 프레드릭 마치, 리 J. 콥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나오고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지 않나요. 그런데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장대한 테크닉컬러 와이드스크린과 버나드 허먼 음악을 동원해 대서사시인 척 찍고 있습니다.

왜 당시 사람들은 이런 시도를 당연히 여겼는데, 우리는 아닌가. 그건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1950년대 미국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출퇴근하는 직장을 가진 중산층 백인 남성 샐러리맨을 인류의 표준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의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이 그레고리 펙은 당시엔 훨씬 보편적인 의미가 있는 영웅이었습니다. 톰의 모든 선택은 관객들의 삶을 대변하는 신화적인 의미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 시대는 갔어요. 우린 굳이 그렇게 당연하게 톰에 감정이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를 일상어의 일부로 받아들인 적 없는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22/01/11)

★★☆

기타등등
[스타 트렉]의 닥터 맥코이였던 디포레스트 켈리가 회상 장면에서 의무병으로 나옵니다.


감독: Nunnally Johnson, 배우: Gregory Peck, Jennifer Jones, Fredric March, Marisa Pavan, Lee J. Cobb, Ann Harding, Keenan Wynn, Gene Lockhart, Gigi Perreau, Portland Mason, Arthur O'Connell, Henry Daniell

IMDb https://www.imdb.com/title/tt1302904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6152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