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했지요. 이미 1961년에 이 연극을 각색한 유명한 영화가 나왔고 작품상을 포함한 수많은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로버트 와이즈와 제롬 로빈스가 감독한 이 영화의 한계는 동시대 사람들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맨해튼 로케이션 촬영이 끝내주는 프롤로그가 끝나면 영화는 익숙한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사운드 스테이지 안에서 70밀리 와이드스크린 테크닉 컬러로 찍은 연극 녹화물요. (당시에 나온 대작 뮤지컬 영화 상당수가 이런 식이었지요.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 말입니다.) 인종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캐스팅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고 두 주연 배우의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불렀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좋은 영화였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꼭 더 좋지는 않더라도 이 원작을 더 영화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스티븐 스필버그라면 기대치가 더 높아지지요.

오늘 영화를 보았는데, 정말 스필버그가 만들었을 법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습니다. 무엇보다 저번처럼 녹화된 연극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린 '시네마'였어요. 61년 영화와 비교해보면 그 장점이 더 잘 보입니다. 다소 연극적으로 보였던 모든 이전의 모든 장면들이 영화적 언어와 논리와 흐름을 찾았어요. 이 영화가 마리아와 토니가 처음 만나는 무도회 장면의 설계 같은 것을 보세요. 그리고 원작의 직설적인 번역과 비교해보세요. 영화는 시공간을 훨씬 영화적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야외 촬영과 낯 촬영이 늘었고 주인공들은 다양한 엑스트라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세계는 훨씬 역동적이 되었습니다. 이 장점이 최대한 활용된 게 'America' 넘버지요.

같은 이야기의 반복도 아닙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기반한 큰 줄거리는 바뀔 수가 없지요. 하지만 스필버그와 각본가인 토니 커쉬너는 같은 소스에서 최대한 다른 이야기를 뽑았습니다. 일단 커쉬너가 쓴 대사는 원작 연극, 61년 영화와 많이 달라요. 더 정교하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에서는 대충 넘겼던 논리와 흐름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이전 작품들보다 더 말이 되고 그럴싸합니다. 종종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요. 아, 스페인어의 비중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스페인어 자막을 넣어주지 않아요. 종종 관객들이 못 알아듣는 언어를 갖고도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전 작품들이 동시대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 작품은 21세기 초반의 관점에서 50년대 중후반 미국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라는 시공간이 어떤 곳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술합니다. 링컨 센터가 건설되기 직전이고 이전까지 살던 사람들은 한 명씩 쫓겨나고 있지요. 푸에르토리코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원래 살던 백인들에게 더 위협적이고, 결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갈등이 폭발합니다. 영화는 이전 작품들에서는 로맨틱한 아우라 밑에 묻어버렸던 불편한 사실들을 가차 없이 끄집어 냅니다.

몇몇 노래들은 원작이나 61년 영화와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 영화에서 'Cool'이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 제트 멤버들이 겪는 불안함을 그리고 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패싸움 전에 권총을 구한 리프와 토니의 갈등을 그리고 있지요. 원작과 전혀 다르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진 댄스 장면입니다. 'Somewhere'는 이전 영화에서 아니타를 연기했던 리나 모레노의 발렌티나에게 갔지요. 배우에 대한 예우였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다른 맥락 안에 들어가 잘 살아난 노래입니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치노의 캐릭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같은 기능의 인물이고 결국 중반에 등장한 총을 잡게 되지만 (이 영화는 굉장히 효과적인 총기 소재 반대 선전물이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드라마의 길을 가지요.

몇몇 장면들은 20세기 사람들은 주저하며 못 쓰거나 건성으로 넘겼던 것들을 직설적으로 들이대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이전 작품들에선 50년대 풍의 톰보이였던 애니바디스를 트랜스 남성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 후반에서 아니타가 제트 일당들과 마주친 장면의 변경이 좋았습니다. 이전 작품에서 이는 발레화된 강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모든 양식적인 장식들을 지워내고 이게 말 그대로 현실세계의 강간임을 명확하게 하지요.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던 제트 일당들의 여자들이 필사적으로 이에 맞서고 항의하게 합니다. 이 장면은 리나 모레노의 발렌티나가 등장해 아니타를 구하고 남자들이 강간범이라고 선언하면서 완성됩니다.

캐스팅이 무지 좋은 영화입니다. 레이첼 지글러, 마리아나 드보스, 데이빗 알바레스, 마이크 파이스트는 무명이고 신인이지만 모두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는 영화에 최적화되었어요. 이전보다 라틴계 배우의 비중도 늘었고요. 가장 약한 배우는 이 영화에서 그나마 기성품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안셀 엘고트인데, 연기가 나빴던 게 아니라 그냥 에너지와 재능이 넘치는 신인들에게 눌린 겁니다. 물론 엘고트는 영화 외적인 다른 문제가 있어서 쉽게 집중할 수 없기도 합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는 관대하게 봤겠지요.

스필버그의 영화는 이전의 영화를 대체할 수 있는 작품인가? 전 이 영화가 여러 면에서 61년 영화를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체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61년 영화가 전달할 수 있고, 스필버그의 영화가 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동시대성, 제롬 로빈스의 오리지널 안무, 솔과 일레인 바스의 엔드 크레딧 디자인과 같은 것들 말이죠. 전혀 다른 식으로 짜여진 'Cool', 'Gee, Officer Krupke', 'Somewhere' 같은 것들은 선택의 여지를 늘릴 뿐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한 편 이상의 각색물을 가질 자격이 있고 이번 스필버그 영화가 아주 뛰어난 뮤지컬이었다는 것입니다. (22/01/12)

★★★☆

기타등등
1. 여전히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이 영화의 묘사에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더 잘 알 테니 제가 뭐랄 수는 없지요. 레이첼 지글러가 푸에르토리코계가 아니라 콜롬비아계라는 걸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역시 뭐랄 입장은 아닌데, 그래도 우크라이나계 배우가 라틴계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2. [해탄적일천] 이야기를 할 때 '모든 여자들에게서 남자들을 제거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 영화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살아남은 여자들에겐 잘 된 일인지도 몰라요. 툭하면 울분이 터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칼을 꽂는 사람들은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감독: Steven Spielberg, 배우: Rachel Zegler, Ansel Elgort, Ariana DeBose, David Alvarez, Mike Faist, Rita Moreno

IMDb https://www.imdb.com/title/tt3581652/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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