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와일더의 경력이 정점을 찍은 건 1960년이었습니다. 그 해에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가 나왔고 1959년엔 [뜨거운 것이 좋아]가 나왔지요. 존재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이 연달아 이 사람의 손을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와일더는 60년대와 70년대에도 좋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의 작품들을 넘어설 수는 없었어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영화의 전반부는 반전이 있는 냉소적인 단편소설 같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버드 백스터는 직장 상사들의 혼외정사를 위해 자기 아파트를 빌려주고 있습니다. 덕택에 조금씩 승진하기 시작한 버드는 전부터 눈길을 주고 있던 엘리베이터 승무원 프랜 큐벨릭에게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하지만 버드가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어요. 프랜의 남자친구가 바로 자기가 아파트를 빌려주고 있던 직장 상사 중 한 명이었던 것이죠.

여기까지만 해도 완벽한 결말을 가진 완벽한 이야기인데, 영화는 중반을 넘기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프랜이 버드의 아파트에서 자살을 기도하고 두 사람은 이틀 동안 같이 지내게 돼요. 영화 중반에 들어서고 나서야 드디어 의미있는 인간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는 버드에게 또다른 승진 기회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별 생각이 없었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시대극이었던 [뜨거운 것이 좋아]와는 달리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영화가 촬영되었던 1959년 겨울 뉴욕이라는 시공간을 그대로 박제한 영화입니다. 당시에 히트했던 뮤지컬 [뮤지맨], 당시에 인기 있었던 텔레비전 시리즈 [언터처블]이 언급되고, 영화를 보면 딱 버드 백스터 수준의 뉴욕 독신남이 어떤 공간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지요. 물론 여기도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습관에 갇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진짜로 어떤 곳인지 놓치기가 쉽지요.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세계는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수상쩍을 정도로 적은 곳입니다. 알면서도 못 본 척 했을 수도 했고, 그냥 할리우드 영화엔 백인만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흑인들은 단 두 명 나오고 차이나타운의 식당에 가면 중국인들이 몇 명 있습니다.)

영화 속 뉴욕이 지금 관객들에게 당시 관객들이 보았던 곳과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영화 자체도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당시 관객들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보는 기회주의자 주인공의 개심담으로 보았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성차별적인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 연맹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 보입니다. 와일더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그것까지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안 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영화가 그리는 성차별이 당시 사람들이 보았을 때보다 훨씬 분명하게 눈에 들어와요.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건 새로운 관객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인 것입니다.

영화의 해피엔딩을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을 알지만,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고만고만한 현실을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굴복하고 타협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루한 타협의 이야기보다는 그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요. (20/06/21)

★★★★

기타등등
1960년 6월 15일에 개봉된 영화예요. 이번 주에 60살이 되었습니다.


감독: Billy Wilder, 배우: Jack Lemmon, Shirley MacLaine, Fred MacMurray, Jack Kruschen, Ray Walston, David Lewis, Edie Adams, Hope Holiday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5360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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